앞서 도덕에 관한 내 입장은 분명하다. 도덕,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은 것.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권력에 사용되어지는 도구라는 것이다.
니체, 철학과를 나온 사람에게 항상 묻는 철학자는 니체였다. 그가 그렇게 만만한가. 내가 들은 바로는 그가 철학자라기 보다 일종의 철학적 영감이 뛰어난 사상가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짜라투스투라를 말하진 않을 것이다. 대개 안티크라이스트를 언급한다. 나도 그런줄 알았다. 지금의 믿음은 믿음으로써 역할을 하지 못한다니 말이다. ‘코스모스’ 우주의 질서, 저 우주에 수놓아진 별들은 그들만의 질서로써 자리잡고 있을 것일진데 삼라만상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떠한 법칙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사유의 이성은 고결하고 높은 자격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겐 감정도 있다는 사실, 더욱 솔직하게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수없이 진행된 논의들의 주제가 아니었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반대쪽 뺨도 내주어라.”의 말을 나는 할 수 있는가. 종교철학 수업 시간이었다. 그때즈음에는 수요예배를 꼬박나갈때였다. 수요예배는 주일예배와 달리 저녁에 드리는 것이라 분위기가 주일과는 다르다. 고요하여 참회가 다가온다.
꽤 이별을 하였기에 덤덤하였으나, 찝찝한 마음을 다독일 수 없어 나도 모르게 교회로 향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에 수요예배 강독은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절이었다.
그렇다. 사랑을 왜 갈구하느냐. 사랑은 고통임에도 올곧이 그 사람을 위해,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라고 바라는 것인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다시 돌아와 그렇게 수요예배를 나가면서 종교철학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 교수님께 물었다. “교수님, 고린도 전서 사랑절처럼 교수님은 사시나요?”, 대답이 가관이다. “나는 못하지. 근데, 그렇게 살려고 하는거지.”
모든 종교서적은 지침서다. 인간은 한계를 완벽히 인정할 때 그것이 결국 고통일 것이다. 남의 고통에 이해한다는 식의 동정, 연민이 아니라, 나의 뼈저린 고통에 시큰한 마음이 썩어 문들어질만큼 썩은 내가 나야 그때서야 조금은 바닥에 가까워졌다라고 할 수 있을거 같다.
그때부터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