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xa

by diletantism

『선악의 저편』 제 1장을 펼쳐보아라. 니체는 제목부터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철학이 미움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급하여 형이상학, metaphysics, meta-, 무엇을 너머, physics, 자연학. ‘자연, 그 너머에 있는 무엇.’ 이며, 원리, 동자,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멀어지는 이원론적 접근법. 여기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진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편견 아닌가.

뭐, 어떤이는 인식의 한계, 혹은 언어의 무력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비철학적으로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없다던가, 아무리 장황하게 단어를 수없이 나열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바로 가슴에 박힌다.


···이제까지 구축해온 숭고한 절대적인 철학적 건물들이 얼마나 빈약한 기초를 가진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이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때가 아주 가까이 온 것 같다. 그것이 기초로 삼아왔던 것은 기껏해야 태곳적부터 내려온 통속적 미신이나, 문법에서 비롯되는 현혹, 혹은 매우 협소하고 매우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실들을 터무니없이 일반화한 것이다.··· — 『선악의 저편』


철학은 그토록 고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기초는 언어와 습관, 그리고 믿음의 찌꺼기였다. 오염된 것들이다. 진리를 뜻하는 aletheia, 판단 중지의 epokhē 같은 말조차 그 자체로 오염되어버린다.

요즘은 오히려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표현이 더 맞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삐딱하게 본다.


옳음, 옳음이 무엇인가. ‘옳기 때문에 행하라.’ 라는 말을 믿기가 힘들어, 칸트를 잘 모르겠다. 어떤이는 학창시절에 이미 삼 비판서를 읽고 들어왔다던데, 경험 상 대체로 칸트를 좋아하던 놈들은 유시민과 비슷한 논리, 사고방식을 가졌더라. 그래서 그렇게 될까 무섭다.


다시 돌아와 옳음의 관한한 여전히 학습된 거 같은, 강제성이라는 비 자유로움속에서 손해 받지 않기 위해 젖어든 도덕이, 우리를 점차 갈수록 가면 무도회나 연극의 나무나 풀의 역할만 수행하도록 만든 장치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한 도덕은 점점 우리를 가면무도회의 배우로 만들어간다.

누구는 나무가 되고, 누구는 풀로 서 있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연극의 제목은 언제나 같다.


“옳음.”


그 옳음을 항상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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