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하복부가 있기 때문이다. - 선악의 저편
····나는 이제 축복 잃고 저주받은 몸이 되었고, 전에는 얼굴만 보아도 더없이 행복했던 그분, 하나님 피해 숨는다. 그 비참함이 여기서 그친다면 얼마냐 좋으랴. 이런 처분 받아 마땅하니 참아야 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먹고 마시고 낳는 모든 것이 저주의 연장이로다.··· - 실낙원 p.432
혹시 스스로가 추하다고 생각한 적 있는가. 요즘 유행하는 패션 우울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의 내면과의 만남에서 허심탄회하게 드러나는 추함들 말이다.
튀빙겐 대학에서 확고부동한 인물인 오페르트 회페 교수의 『철학의 거장들』 시리즈의 인사말 자리에 자리한 신창석 교수님의 첫 문장은 꽤나 흥미롭다.
‘20세기가 남성적 정복과 경제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여성적 안정과 문화의 시대로 전망된다.’ - 철학의 거장들 p.13
무려 2001년도에 작성했다. 돌이켜 본다. 나는 여성시대에 맞게 살고 있는가? 고추와 불알이 달린 이상, 어려울 거 같다. 그래도 가쁘게 살아남고는 있다. 집에 여자가 세 명이나 있기 때문에 회피하는 법이 습관으로 배었다.
제 1의 성으로써 결국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은, 언제나 본능에 이끌리며 짐승 못지 않게 추한 존재라는 것이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자들은, 제 1의 성으로써의 지위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거나,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거나.
추함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선악의 관계성과 같아 개념적으로 총체성을 지닌다. 언제나 함께한다. 그렇다면 추함이 무엇이고 어디까지가 추함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을 읽어보라. 제목부터 매우 흥미롭다. 추에도 미학적 탐구가 가능함을 던지는 제목은 독창적이다.
내 같은 경우, 추함에 대한 집착은 침묵에 대한 불편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찌끄레기가 올라오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으로 바뀔때가 많았다. 그러나 되려 더 스팀이 올라오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대부분 또한 인간 깊숙이, 음습한 사람관계에서 비롯한 쓸데없는 문제들, 이런 것들을 곁에서 침묵하는 것, 모르는 척, 못 본 척함에 있어 굉장히 부당하게 생각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들이 한 없이 별 볼일 없는 자들이라고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길을 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놈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추함을 마주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