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는 10월, 런던에선 낯설고도 매혹적인 음악이 흐른다. 유럽 최대 규모의 한국 음악 축제, K-뮤직 페스티벌이 다시 돌아왔다. 주영한국문화원이 주최하는 이 페스티벌은 올해로 12회를 맞이하며, 전통과 현대, 국악과 클래식, 한국과 영국의 문화가 교차하는 다채로운 무대를 선보인다.
2025년 10월 1일부터 11월 20일까지 약 두 달간 이어지는 이번 페스티벌은 단순한 국악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동시대 음악이 지닌 실험성과 예술성을 무대 위에서 과감하게 펼쳐 보이며, ‘K-컬처’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K-뮤직의 문을 여는 이옥경과 마크 펠
올해의 개막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이옥경과 영국 디지털 아티스트 마크 펠의 협업으로 시작된다. 킹스플레이스에서 열리는 이 공연은 전통 악기와 전자 사운드가 섞인 실험적인 사운드 퍼포먼스로, 두 장르의 아티스트가 처음 만나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너지를 선보인다. 음악은 더 이상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임을 실감하게 한다.
국악과 오케스트라, 잠비나이의 도전
10월 5일, 런던의 바비칸 센터는 특별한 데뷔 무대를 맞이한다. 한국의 포스트 록 밴드 잠비나이가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 한국 전통 악기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잠비나이의 음악은 이미 해외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여기에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더해지며, 국악이 가진 감정의 깊이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여성 국악과 유럽 감성의 만남, 트리오 힐금
이국적인 감성이 흐르는 10월 18일, 사우스뱅크 센터에서는 트리오 힐금과 영국 보컬리스트 겸 바이올리니스트 앨리스 자와즈키의 협연 무대가 펼쳐진다. 이 공연은 광주에서 열린 월드 프리미어에 이은 두 번째 공연으로, 동양과 유럽 감성이 섬세하게 교차하는 음악이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사운드로 철학을 말하다 – 박지하의 솔로 무대
박지하의 공연은 단순한 음악회를 넘는다. 10월 22일 리치믹스에서 열리는 그녀의 솔로 무대는 다가올 정규 앨범 *『All Living Things』*의 곡들을 미리 선보이며, 피리와 생황, 양금 등 한국 전통 악기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삶과 순환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의 음악은 고요하지만 강렬하다.
전통의 미래, 디오니소스 로봇
11월 14일, 작곡가 원일이 이끄는 다원예술 프로젝트 *<디오니소스 로봇>*은 한 편의 의식(ritual)처럼 진행된다. 샤머니즘과 전통, 전자음향과 영상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이 무대는 니체와 백남준을 향한 예술적 오마주이자, 한국 전통 예술이 나아갈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런던재즈페스티벌과의 공동 주관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로열 알버트 홀을 울리는 재즈국악, 그레이 바이 실버
국악과 재즈의 만남은 예상보다 더 깊다. 11월 15일, 그레이 바이 실버는 피아니스트 이한빈을 중심으로 대금, 타악기, 보컬이 어우러진 4인조 앙상블이다. 런던 로열 알버트 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서 열리는 이들의 무대는 K-뮤직이 단순한 국악 소개를 넘어 창작 음악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성진 × 신동훈 × 런던 심포니, 대미를 장식하다
11월 20일, 대망의 폐막 무대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작곡가 신동훈, 그리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루어진다. 신동훈이 조성진을 위해 특별히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 세계 초연되는 자리로, 한국 클래식 음악이 가지는 깊이와 위상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다.
K-뮤직의 정체성, 그리고 진화
올해 페스티벌을 총괄한 박재연 선임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했다.
“정통 클래식부터 크로스오버 공연까지, K-뮤직은 점점 더 넓은 스펙트럼의 예술적 실험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처럼, K-뮤직 페스티벌은 더 이상 ‘전통 음악 소개’에 머물지 않는다. 이 페스티벌은 전통의 뿌리를 딛고 있지만, 그 위에 현대적인 감각과 철학, 그리고 기술을 더해 세계 음악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고 있다.
K-POP으로 전 세계가 한국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K-뮤직이 그 ‘깊이’를 더할 차례다. 런던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의 소리는, 낯설지만 강렬하고, 이질적이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그 속엔 지금의 한국,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