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길을 묻다

네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

by 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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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내게 이 나라는 늘 알프스의 눈 덮인 봉우리,
정밀한 시계와 비밀스러운 은행,
그리고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위스를 그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온 한 친구를 우연히 만나면서,
나는 이 작은 나라가 품고 있는 깊이와 다양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네 개의 언어가 함께 사는 나라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스위스는 국가 공고문을 네 개의 언어로 써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공고문을 네 개씩이나요?”

그가 말한 언어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로망슈어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스위스에서만 쓰이는, 독특하고 오래된 언어라고 했다.

“국경을 접한 나라에 따라 지역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요.
그래서 하나의 도시에서도 간판, 과자 포장지, 안내문까지
모두 네 가지 언어로 적혀 있어요.”

그 말이 아직 머릿속에 정리되기도 전에
그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가족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나는 프랑스어와 로망슈어를 써요.
엄마는 로망슈어만,
아빠는 독일어와 로망슈어,
오빠는 독일어와 로망슈어를 해요.
서로 말이 안 통해도, 우리는 잘 지내요.”

한 가족 안에서 언어가 네 개나 다르게 쓰인다는 것.
문화적 충돌이 아니라, 공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곰이 지키는 도시, 베른에서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스위스를 제대로 보고 싶어졌고,
유럽 연수가 끝난 후 곧장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첫 번째 목적지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
도시 이름의 유래는 흥미롭다.
12세기 말, 도시를 건설한 베르톨트 5세가
사냥에서 처음 잡은 동물의 이름을 도시명으로 정했는데,
그 동물이 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베른은 지금도 곰의 도시로 불리며
곰 동물원이 존재하고, 도시 곳곳에 곰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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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간을 걷다

베른의 구시가지는 마치 중세로 시간을 거슬러 들어간 듯한 풍경이었다.
고딕 양식의 건물, 거미줄처럼 얽힌 트램 전선,
6km에 걸친 석조 아케이드는 과거의 시간 속을 걷게 했다.

길을 걷다 보면, 작은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고대의 창고들을 볼 수 있다.
원래는 배달 물건을 잠시 두는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예쁜 카페와 상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간은 흘렀지만, 공간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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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머물던 집, 아인슈타인의 흔적

대성당 근처에는 아인슈타인의 집이 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그는 이곳에서 스위스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며
상대성 이론을 구상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그 집 앞엔
수많은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중국인 관광객이었는데,
그 모습에 새삼 그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실감했다.

베른 시는 이 천재 과학자의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도시 곳곳에 그의 초상화와 안내문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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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창문 인형과 길 위의 언어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아레강이 나온다.
고요히 흐르는 강 너머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한 집의 창문에 거꾸로 매달린 인형을 보게 되었다.
현지인에게 물으니,
“사람이 집에 있으면 인형이 바로 서 있고,
외출 중이면 인형을 거꾸로 두어요.”
그 유쾌한 발상에 웃음이 났다.
단순한 기능이지만 정감 어린 생활 방식이 묻어났다.


같은 나라, 다른 언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역에 따라 표지판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제네바는 프랑스어 사용 지역이라
도로 표지판도 프랑스어(‘Sortie’)로 표시되어 있고,
베른은 독일어 사용 지역이라
같은 ‘출구’를 ‘Ausfahrt’라고 표기한다.

같은 나라지만, 도시 하나를 건너면 언어가 달라지는 경험.
그 문화의 깊이와 다양성이
스위스를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이해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토블론의 도시에서 배운 것

스위스 베른은 초콜릿 토블론(Toblerone)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도시에 반한 이유는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그들의 공존의 방식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 다른 역사, 다른 지역.
하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이름, 스위스(Switzerland) 아래에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

그 여유와 다양성,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생각지 못한 따뜻함.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스위스 여행의 진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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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나뉘지만 마음으로 이어지는 나라, 스위스.
다음 여행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 특별한 나라를 꼭 한 번 걸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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