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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Dec 27. 2023

오늘의 운세 15

오래된 문서로 목돈이 생긴다

오늘 같은 운세에는 집안의 오래된 문서를 찾아 헤맬 법하다. 오래된 문서라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1976년에 발행된 <뿌리깊은 나무>다. 잡지가 아니더라도 그보다 오래된 책이나 책에 따라 붙었던 부록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확인해 보지 못했다. 그 오랜 세월을 거쳐온 것들은 2000년대 전후에 발행된 서적들과 어깨를 겨루며 오래된 책 특유의 향기를 풍기며 이 집안의 공기를 더하고 있다. 그저 먼저 간 사람의 뜻을 살려 그를 추억하는 방안으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이다. 하지만 1977년과 1978년에 발행된 월간 <소년 중앙>은 소장하고 싶어서 보관하고 있다. 가끔 그 오래된 잡지를 뒤적이고 있으면 아련한 향수에 젖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하기 때문이다.

1977년과 1978년 <소년 중앙>이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시댁 어르신들이 이사를 가지 않은 채로 40년 넘게 한 곳에 정주한 삶을 고집하셨기 때문이다. 시댁이 재개발지역으로 묶이지 않고 두 분이 여전히 살아계신다면 그 집에서 아직도 살고 계시지 싶다. 하지만 재개발로 집이 헐게 되자 40년 넘게 쌓아놓기만 했던 다락방 짐들을 정리하게 되었을 때 30년도 넘은 보물들이 쏟아졌다. 아이들의 초등학교 교과서며 노트, 장난감, 잡지, 신문 등등. 습기를 먹어서 버려진 것도 많았지만 <소년 중앙>은 양호한 상태로 보관돼 건질 수 있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 77년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엿보고 싶어 <소년 중앙> 12월호를 꺼내 훑어본다. 이상하게도 잡지 어디에도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사는 실려있지 않다. 크리스마스의 ㅋ자도 찾아볼 수 없다. 요즘만큼 크리스마스가 그리 인기가 없었던 걸까. 특집으로 동물에게서 배울 점이라는 평범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시절의 아이들이 예수 탄생의 축복을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리라. 기억하건대 77년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어머니가 교회를 못 가게 한다고 벌을 주시라는 고해성사를 했고 그해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선물이란 걸 받아보았다. 그러니 그때라고 크리스마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용한 가운데 지나갔을 뿐이다.

77년 12월호 <소년 중앙> 표지모델에 여자아이가 눈에 익는다. 작년에 세상을 뜬 강수연이다. 표지모델의 소녀를 서울 교동국 5학년 강수연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깜찍한 소녀가 대한민국 영화계를 대표할 배우가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을까. 학생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수놓고 있는 작가에는 <꺼벙이>의 길창덕, <폭풍의 그라운드>의 이두호, <번데기 야구단>의 박수동, <달려라 태풍>의 김소중, <다모 남순이>의 방학기, <물망초>의 황수진 등이 있다. 독자 참여란이 많은데 학생들이 투고한 산문을 실은 문예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발표된 남의 작품을 보내는 장난을 쳤는지 ‘이미 발표된 작품을 자기가 쓴 것처럼 적어보내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을 내보냈다. 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코너, 상담실에서는 그 당시 학생들도 외모나 친구 등에 대해 고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꺼벙이>는 12월호로 연재가 종결됨을 알리고 있는데 길창덕 작가는 독자에게 애정 어린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다.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여기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그때의 그 많은 어린 독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풀섶에 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이 깊어갑니다. 그동안 꺼벙이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51개월 동안 꺼벙이를 성원하고 격려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소음이 요란한 도시의 학교에서 송아지 울음소리 한가한 농촌의 사랑방에서 혹은 뻐꾸기 우는 두메와 흰 물새 나르는 바닷가 어촌에서 고사리 같은 귀여운 손으로 정성어린 편지를 써 보내주신 그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과연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끝을 맺는 지금 몹시 마음 조여지기도 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 일일이 회답해 드리지 못한 점 정중히 두손 모아 사과 드리며 아울러 ⚪⚪대학교의 꺼벙이 그룹인 <꺼우회>의 무궁한 발전 있기를 빕니다. 그럼 독자 여러분 안녕히…


<소년 중앙> 1977년 12월호. 코팅되지 않은 표지나 갱지에 인쇄된 내용물은 누렇게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서 세월이 지나간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늘 나는 운세의 지침에 따라 2023년 크리스마스의 촉을 세워 옛것에 기웃거리며 지냈다. 추억이라는 목돈을 잔뜩 장만한 것이다.(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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