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칠 수가 들어오니 신경 써야
다칠 수가 들어오니 신경 써야
‘다칠 수가 들어오니 신경 써야’한다. 운세를 읽고 마음을 졸았다. 어제에 이어 계속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울적하고 심드렁한 기분을 어떻게 감내하며 조심할 수 있을까. 나는 폭발 직전이다. 숨 쉬기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려고 지하 주차장에 가 기다리는데 차도 오지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진 콘크리트 기둥 사이의 빈 공간을 중심으로 도는데 어머니는 벌써부터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어딜 데리고 가려고 이 고생을 시키냐고, 기운이 없어 죽겠는데 의자 하나 없는 곳에다 데려다 놓고 서 있게 하냐고, 땀이 나서 환장하겠는데 집에 데려다 놓으면 안 되느냐고. 아침마다 어머니와 벌이는 등원 전쟁이다. 오늘같은 기분이라면 불평불만의 어머니를 상대하기가 버겁다.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뭘 바라겠는가마는 그래도 엄마니까 딸의 바닥난 감정을 조금은 직감하여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때보다 차는 20분 늦게 도착했다. 어머니를 너무 일찍 모시고 내려간 게 화근이었다.
어제 딸아이와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딸아이와도 전쟁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내 마음이 문제이고 그래서 딸아이는 저토록 제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는 것일 게다. 엄마인 내가 조금 다정하게 대해도 일은 그리 커지지 않았을 텐데, 어긋난 감정을 풀지 못했다. 이미 지난 일을 갖고 다시 물고 늘어지며 딸은 내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을 했다. 딸은 그 말을 들어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고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 듣고 싶은 걸 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딸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 때로 발작적으로 나는 그런 딸이 진저리가 처졌다. 그래서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을 끝내 건네지 않았다. 하루가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어제의 내 운세는 ‘기쁜 일이 집안으로 가득’이었다. 하지만 딸과 그렇게 감정적인 소모를 하고 나니 집안으로 가득 들어온 것은 '재앙'뿐인 것 같았다.
잠에서도 그 불편한 감정은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고 어제만큼 오늘도 내내 불행한 느낌으로 지냈다. 자식이고 어머니고 그 모든 혈육관계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저 조용히 잠들고 싶었다. 어머니가 센터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어머니 치매 약을 챙겨드리고 나는 수면제에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잠자는 일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은 하루였다. 저녁 7시 무렵 누워서 아침 7시 무렵에 일어났다.
어제보다 감정은 무뎌졌다. 커피라도 마시며 대화를 하려고 딸아이를 깨우러 방문을 열었다. 방에 아이가 없었다. 어젯밤에 집을 나간 모양이었다. 딸은 딸대로 엄마에게 화난 것을 그렇게 풀었다. 딸아이는 제 남편 집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화해의 손짓이 아니었다. 다시 어제 일을 거론하며 내가 자기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그 집요함이 나를 자극하였고 오기가 발동한 나는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만하자고,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난 거라고. 전화가 뚝 끊겼다. 딸아이는 저녁 무렵 또 전화를 해서 나의 잘못을 따졌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잃었다. 머리꼭지가 돌기 일보 직전이었다.
요즘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자주 보게 된다. 내가 화가 많다는 것을.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물건을 집어던지고 혼자 욕을 해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했던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자신에게 정상이 아니야, 하고 자가진단을 하며 씁쓸해하다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친구가 너 정상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그래, 우리는 정상이야 하면서 의기투합했다. 그래도 묻는다. 나는 정상일까. 다칠 수가 들어온다고 하더니 이미 심신이 쇠약했다.(2022.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