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를 만드는 시간
갓 지은 꼬들꼬들한 밥처럼
처음엔 생기 넘치고 퉁명스러웠다
무른 마음은 감추고 있었던 시절
엿기름가루를 물에 우려냈을 때처럼
어디서부터 뽀얗고 따뜻해졌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조바심 속에서
나는 조심스레 잠겼다
설탕으로 달달한 순간을 얻고자 애썼지만
말 못 할 쓴맛도 분명히 스며들었을 터
보온 버튼을 눌러
스스로 삭히고 삭히는 긴 시간
시간은 흐르다가도 멈춘 듯했고
열대야의 더위에 잠 못 이루는 불면
일생을 건 사투 끝에
허물처럼 벗겨진 마음들이
둥실 떠오를 때까지
참고, 버티고, 기다렸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순간
한소끔 끓여내야 할 시간이 왔다
느닷없이 솥단지에서 팔팔 끓어 넘치는 건
초대되지 않은 인생의 불청객처럼
단련된 시간 속에서도 정제되지 못한
불순물이 생채기를 냈으니
나는 기나긴 시간 삭히면서
덜어내고, 식히고, 내어줄 수 있었다
내가 식혜처럼
누군가의 그릇에 담긴다면
그들은 말하겠지
‘밥알이 덜 삭았다’고
‘쓴맛이 강하다’고
아직 온갖 불순물을
인생에서 걸러내는 중이라
기다림과 쓸쓸함과 실패 같은 쓴맛들을
충분히 삭히고 끓이고 나면
그들이 맛보는 단맛은
내가 겪은 모든 쓴맛으로부터 왔다고
그때는 조용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셔서 저는 계절과 상관없이 자주 식혜를 만듭니다. 꼬들꼬들하게 밥을 짓고 엿기름가루를 물에 주물러 보자기에 넣고 조심스레 거릅니다. 갓 지은 밥 위에 미지근한 엿기름물을 붓고 설탕도 적당량 넣습니다. 전기밥솥을 보온으로 맞추고 6시간 내지 8시간을 두고 삭은 밥알이 허물처럼 떠오르면 그제사 한소끔 끓여내야 할 시간이 된 거지요. 그때 옆에서 지켜 서 있지 않으면 불순물이 막을 이뤄 끓어 넘쳐 솥단지에 달라붙고 가스렌지까지 범람하여 닦아내는 데 애를 먹지요.
그런데 어머니, 그 모든 과정이 마치 제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삭힌 밥알처럼 저도 조금은 익어가고 있는 걸까요. 제 속에 있는 불순물, 버텨야 했던 열기와 쓴맛들도 지금은 단맛으로 바뀌는 중일까요. 어머니, 저도 잘 삭힌 식혜처럼 그렇게 익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그릇에 조심스레 담겨도 따뜻하고 부드러울 만큼 그렇게 단단히 익어 당신 앞에 놓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