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책 읽어주는 할머니

책 읽어주는 할머니

by 인상파

책 읽어주는 할머니, 김인자 글, 이진희 그림, 글로연


책 읽어주는 할머니


책: 책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읽: 읽어주는 책은 변주가 돼요

어: 어머니가 읽어줄 때는 자장가

주: 주머니쥐도 곤히 잠들고

는: 는개가 유리창을 넘볼 때

할: 할머니가 사투리 섞어 읽어주면

머: 머쓱해진 발가락은 꼼지락꼼지락

니: 니트 소맷부리는 입가를 오르락내리락


읽어주는 사랑, 피어나는 기억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화생활은 도시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시골에서도 글을 배우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할머니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분들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 눅진한 삶의 풍경 앞에서 절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던 분들이 글자를 익히고, 자신의 생을 기록해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요,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친정어머니도 오랫동안 글을 모르고 사셨지만, 말년엔 글자를 익혀 마을 총무 일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진 말이지요. 치매 초기에 저는 그림책을 통해 어머니의 기억을 붙잡아 보려 했습니다. 처음 함께 읽은 책은 <돼지가 주렁주렁>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엄마, 게으른 남편은 어떡하면 좋을까?”하고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뭘 그런 걸 데리고 살아, 확 던져버리지!” 하시더군요. 그 말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도 하고, 몇 번은 서로 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순간 “이걸 읽어서 뭐 하냐”며 책을 집어 던지셨고, 저도 끝내 인내심을 바닥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책 읽어주는 할머니>의 손녀는 다릅니다. 거의 매일 밤이면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듯 선명하지요.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가 손녀의 도움으로 점차 책을 익히게 되고, 마침내 팔순 잔칫날 손님들 앞에서 그림책을 낭독하게 되지요. 사람들이 숨죽인 듯 할머니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나요. 그리고 그날 이후 할머니와 손녀의 입장은 바뀌게 되지요. 듣는 쪽이 할머니가 아니라 손녀로요. 책을 매개로 오가는 마음과 마음, 그 사이에 피어나는 따뜻한 정. 이 그림책은 단지 책 읽기를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이어주는 사랑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전 25화85.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