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문학동네)
끝까지 곁에 남은 것
‘생’이라는 말은 묵직하다. 그 속에는 고단함이 스며 있고,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따라붙는다. ‘삶’이라 하면 조금은 가볍게 일상의 기쁨과 고통을 떠올릴 수 있지만, ‘생’은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단어처럼 다가온다. 그처럼 『자기 앞의 생』은 무겁고, 고단하고, 때로는 버겁지만, 끝내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을 통해 그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모모, 유대인 수용소의 트라우마와 병든 몸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로자 아줌마.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어떤 사회적 장치도 갖지 못한 채, 사회적으로 지워진 존재였다. 모모의 말대로 그들은 ‘아무 것도, 아무도 없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다.
소년기와 노년기라는 전혀 다른 세대에 속했지만, 시작과 끝에서 따져보면 두 사람은 똑같은 연령대일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전부이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겉으로는 돌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생의 무게는 어린아이에게도, 늙은 여인에게도 다르지 않게 내려앉았다.
작품 초반, 모모는 양탄자 행상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버려진 아이가 던진 이 물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책과 코란을 품고 다니며, 모모에게 삶의 무게를 견디는 지혜를 전해주었다. 작품 말미에서 모모는 그 말을 다시 떠올린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결국 이 소설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과 의지라는 이름의 사랑,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의 온정을 다룬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로자 아줌마의 수용소 기억은 그녀의 내면을 끊임없이 파괴했고, 신분증 부재는 그녀를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녀의 삶은 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 삶”, 다시 말해 이름 없는 생으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히틀러의 초상을 간직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그녀가 과거의 공포 속에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상징이었다.
열네 살 소년은 그런 로자 아줌마를 이해했다. 그는 임종이 가까운 로자 아줌마를 이스라엘 친척에게 보낸다고 거짓말을 하고, 지하 은신처로 데리고 가 존엄한 죽음을 맞게 했다. 모모에게나 로자 아줌마에게의 그 시간은 살아서 처음으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 도둑질당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한다.” 처음엔 엉뚱한 아이의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진실을 찌른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회 제도에서 밀려난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 시간은 늘 빼앗기는 경험이었다. 교육, 안정, 존엄 있는 죽음조차도. 모모는 병원이 ‘살덩이가 아직 썩지 않아 주삿바늘 찌를 틈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억지로 살아있게’ 하기에 로자 아줌마를 병원에 보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병원은 치료의 공간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는 또 다른 수용소였다. 수용소에서 존엄을 빼앗긴 채 살아남은 그녀에게, 병원에서의 시간은 더 이상 그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되찾으려면 잃어버린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움켜쥔 사회 구조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모모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줌마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며, 누구도 도둑질하지 못한 존엄의 시간을 선사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끝까지 곁에 남아 시간을 지켜주는 힘은 사랑이다. 모모의 이야기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죽음과 상실을 통과하며 그는 성장했고,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힘이라는 진실을 배웠다.
『자기 앞의 생』은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맺는다. 끝까지 곁에 남은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