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에서 완성된 사랑

by 인상파

피천득의 「인연」(민음사)


추억 속에서 완성된 사랑


인연 속에 만난 사랑은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끝내 이루어지기보다는 꺾이는 경우가 많다. 설렘은 금세 사라지고, 누구나 앞에 놓인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어지지 못했기에, 사랑은 오히려 더 선명히 남는다. 만나지 못했기에, 함께하지 못했기에, 그 부재와 결핍이 추억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의 아사코, 그리고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주느비에브와 기 푸셰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서만 완성되는 사랑의 얼굴을 보여준다.


종종 ‘인연’이라는 말을 삶 속에서 무심히 쓰곤 했다. 그 말의 그림자가 내 입가를 떠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의 수필 「인연」 때문일 것이다. 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두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는데, 지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인연’이라는 단어를 꼭 적곤 했다. 그만큼 인연이라는 말을 사람 사이에 흐르는 연결의 고리로 여기며, 관계의 첫머리에 두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수필에서 언급된 영화 <쉘부르의 우산>은 언젠가 반드시 마주쳐야 할 인연의 작품으로 남아있었다.


「인연」의 아사코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마음을 흔든다. 어린 날의 발랄한 꼬마, 청춘의 싱그러운 여대생, 그리고 중년의 결혼한 여자로 변해간 그녀. 화자는 단 세 번의 만남을 가졌지만, 모든 만남이 같은 무게를 갖지는 못했다. 마지막 만남 앞에서 작가는 고백한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리워하고 말 걸!’ 하는 후회의 심정이 묻어난 말이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청순한 아사코의 이미지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 고백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빛을 향한 아쉬움과,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러나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마음이 향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으랴. 후회하더라도 결국은 가서 만나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가 첫사랑의 대명사라면, 「인연」의 아사코는 인연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아사코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여자는 내 안에서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동경과 그리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이름은 유치원 시절의 천진한 모습에서 시작해 목련꽃처럼 청순한 청춘의 얼굴로 이어지고, 결혼 후 서서히 시들어가는 중년의 여인으로 겹겹이 남는다.


작품 속 세 번의 만남은 세월의 흐름과 인연의 무상함을 압축한다. 첫 만남에서 아사코는 애교 많고 생기 넘치는 유치원생이었다. 특히 열일곱 살의 화자는 그 어린 소녀에게 마음을 쏙 빼앗기고 만다. 헤어지며 아사코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손수건과 반지를 건네며, 안데르센 동화책 표지에 그려진 뾰족지붕 집에서 언젠가 함께 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 순진한 말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못한 화자는 십여 년 후 대학생이 된 아사코를 다시 찾아간다. 그러나 그는 추억을 붙들고 살았지만, 아사코는 부모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때 일을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둘은 학원을 산책하다가 아사코가 두고 온 연두색 우산을 찾으러 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화자는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된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날 밤, 둘은 문학과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다 악수로 헤어진다. 그리고 또 십여 년 후, 세 번째 만남에서 아사코는 이미 결혼해, 백합처럼 서서히 시들어가는 중년의 여인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자크 드미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노래한다. 주느비에브와 기 푸셰의 눈부신 첫사랑은 전쟁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고, 결국 서로 다른 길을 택한다. 부유한 보석상 카사르와의 결혼은 안정적이었지만, 설레던 약속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눈 내리는 주유소에서의 재회는 서로의 달라진 삶을 확인하는 순간이자, 담담한 작별의 장면이었다.


마치 또 다른 ‘인연’의 변주를 보는 영화였다. 아사코와 쥬느비에브, 두 인물은 한때 온 마음을 흔드는 존재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현실의 무게 속에 더 이상 예전의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그 불완전함 속에서 추억은 빛을 얻는다.


인연으로 시작된 사랑은 반드시 완성되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 끝내 이어지지 못했기에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선명한 흔적으로 남는 것일 게다. 「인연」의 아사코와 <쉘부르의 우산>의 쥬느비에브는 우리에게 스쳐간 이름들, 잊히지 않는 얼굴들, 그것이 바로 인연이고, 우리의 우산 아래 젖어든 추억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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