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푸른숲)
기다림의 인간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읽은 독자로서 그의 또 다른 작품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만났을 때, 나는 조금은 기이하고 이상한 사람들 이야기에서 보통 사람들을 소재로 따뜻한 이야기가 전개되리라 여겼다. 전작보다는 덜하지만 후속작이 주는 여운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책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
책이 막 출간된 2009년 무렵,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의 병이 재발하여 이런저런 검사로 병원에 드나드는 일이 잦았고, 유치원 입학을 앞둔 아이와 초등 3학년이던 아이에게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절대적인 시간 부족 속에서 늘 허둥대던 나에게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라는 제목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처럼 다가왔다. 제목 하나만으로도 나를 붙잡아 세우고, 잠시나마 숨을 고르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를 읽으며 기다림이라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인생의 숱한 시간을 기다림 속에서 보내왔음을 깨달았다. 작품의 원제는 곧 이 글의 제목 그대로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한국어판 책 제목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라는 시적인 문장으로 바뀌어 나왔다.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시간이 많은 어른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에는 존슨의 부재를 기다리는 화자, 이미 세상을 떠난 롤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기억,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지빠귀를 기다리는 참새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기다리는 행위 자체를 기다리는 인간’과 연결된다. 단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제의 사실적 표현은 한국어판에서 시적이고 은유적인 제목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시간을 오래 견디며 기다리는 존재,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곧 ‘아주 많은 시간을 가진 어른’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에 관한 또 다른 글 〈기다림을 기다리며〉에는 들판의 소가 풀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본능적이고 무심한 의미 없는 기다림이라면,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행위는 기다림을 학습하고 고통스럽게 체득했으며, 심지어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와 달리, 인간은 기다림을 삶의 무게로 끌어안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작품에서 나오듯,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고, 생일을 기다리고, 스무 살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어느 할머니의 라디오 출연을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일화도 등장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일생을 기다리며 사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동네 바보 술꾼이 ‘기다려’라고 중얼거리는 말조차, 화자는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것, 무(無)를 기다리는 것이라 추론한다. 결국 인간은 특정한 대상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를 기다리는 존재, 곧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는 존재로 드러난다.
이렇듯 페터 빅셀은 기다림을 통해 인간의 시간을 드러낸다. 기다림은 단순한 공백이나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근본적인 방식이 된다. 그렇다면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은, 결국 기다림을 견디고 기다림과 함께 살아가는 성숙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고백일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곧 삶이 된다.
인간을 도구적 존재, 직립의 존재, 지혜의 존재 등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페터 빅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단순히 현재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늘 다가올 시간을 의식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부재를 기다리고, 이미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린다. 기차를 기다리듯, 계절을 기다리듯, 사랑과 죽음마저 기다리며 살아간다. 기다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기다림은 희망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무의미 속에서 자신을 소진시키는 형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다림을 버린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다림은 곧 시간의 경험이며, 인간이 시간에서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새롭게 부른다면, 그것은 기다리는 인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