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

by 인상파

전영택의 「화수분」(창비)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들의 체온으로 동사를 면한 어린 자식, 부모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어린아이를 들어다 소달구지에 싣고 가는 나무꾼. 「화수분」을 생각하면 유독 이 결말이 먼저 떠오른다.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라는 ‘화수분’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그와 아내는 한겨울 한데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도, 아이가 살아남은 것은 화수분이라는 그의 이름에 조금은 걸맞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행랑아범인 화수분이 주인인 ‘나’의 집에 살게 된 것은 올 9월이다. 양평 시골집으로 다리를 다친 형님을 도우러 가는 것이 추수철이니, 행랑으로 들어온 것은 길어야 한 달 남짓이다. 아범은 착하기는 하나 처자식을 먹여 살릴 경제력이 없다. 지게꾼으로 막노동을 하지만 일을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라 식구들이 굶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 그가 형님네 일손을 도우러 가기 며칠 전 날, 한밤중에 흐느껴 우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얼굴도 모르는 집에 딸을 줘버렸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도 못하고 사는 마당에 딸이나마 배곯지 않게 살기를 바랐지만, 딸자식을 보낼 수밖에 없는 제 기구한 운명이 서러웠던 것일까?


그의 아홉 살 난 딸은 어멈에게 못되게 구는 철부지 아이였다. 조금 모자라는 구석이 있기는 해도 어멈 또한 딸아이를 아끼는 보통의 어머니였다. 딸아이를 데리고 가는 부유한 집안의 여자가 먹을 것을 사주며 딸아이를 구슬리자, 어멈은 그 못난 사람 특유의 화법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친다.


“제 새끼를 어떻게 남을 줍니까? 그리고 워낙 못생기고 아무 철이 없어서 에미 애비나 기르다가 죽이더래도 남은 못 주어요. 남이 가져갈 게 못됩니다. 그것을 데려가시는 댁에서는 길러 무엇합니까. 돼지면 잡아서 먹지요.”


딸아이를 돼지보다 못한 자식이라며 폄하하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어미로서 자식을 보낼 수 없는 마음을 돌려 표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 기저에는 가난을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범이 시골 양평에서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어멈의 행동에서, 또 어멈이 길을 떠나 양평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범이 어멈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궁핍한 사람들 나름의 가족애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딸자식을 남에게 팔 듯 보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화수분은 원래 양평 사람으로 형 둘에 집안이 넉넉했다. 그러나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아내를 얻은 시점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맏아들이 죽고 소를 도둑맞고 하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결국은 고향을 등지고 거지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고향의 형님으로부터 추수를 도와달라는 소식이 오자, 거절하지 못하고 염치불구하고 주인집에 처자식을 맡기고 길을 떠나게 된다.


추수 끝내고 쌀말이나 지고 올 거라고 여겼던 화수분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의 아내는 주인에게 ‘오지 않으면 자신이 가겠다’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러고서는 엄동설한에 양평을 향해 길을 떠난다. 마침 고된 농사일에 몸살로 앓아누워있던 화수분은 아내의 편지를 받고는 그도 같은 날 가족들을 데리러 서울을 향해 떠난다.


화수분과 아내는 저녁 무렵 양평에서 백 리 정도 거리의 고개 마루에서 상봉하게 되는데, 아내는 몸이 얼어서 말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화수분은 어린 것을 사이에 두고 그런 아내와 껴안고 밤을 지새우다가 참변을 당하고 만다.


이런 불행한 화수분 가족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 그의 동생 S를 통해 듣게 된다. 화수분의 부부는 동사하고 세 살 난 딸아이는 나무꾼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이야기를. 마치 신문의 부고 기사를 접한 것처럼 화수분 가족 이야기는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들 부부의 죽음에 어린 자식을 살린 숭고한 희생정신이 미담으로 더해지면서. 어쨌든 ‘나’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가 아닐 수 없다.


화수분 부부의 죽음을 신문 기사처럼 접한 ‘나’의 시선 속에서,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는 가난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는 사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소식이 아닐까. 화수분이라는 이름이 주는 풍요의 상징은 끝내 그에게 닿지 못했지만, 아이의 생명 하나만은 기적처럼 남았다. 그 아이의 숨결이야말로,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작은 희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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