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를 결심

by 인상파

김정한의 <사하촌(寺下村)>(문학과지성사)


불지를 결심


일제강점기의 농촌을 다룬 작품을 읽다 보면 마음이 저려온다. 죽도록 일해도 남는 것은 빚뿐, 결국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거나 고향을 등지고 유랑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유정의 <만무방>, 현진건의 <고향>, 최서해의 <탈출기>가 그러하다. 나라를 잃고 지주의 등쌀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고향은 지켜야 할 터전이 아니라, 도망쳐야만 하는 땅이었다.


김정한의 <사하촌>도 이 길 위에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조금 다르다. 여기에는 ‘불지를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이 체념으로 끝나지 않고 저항으로 바뀌는 순간, 오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작품은 일제와 결탁한 보광사 승려들의 탐욕으로 시작한다. ‘자손 대대로 복을 받고 극락에 간다’는 말에 속아 논을 시주한 치삼 노인의 이야기, 그리고 그 논을 빌려 다시 소작하며 굽신거려야 하는 아들 들깨의 현실은 잔혹하다. 여기에 혹독한 가뭄까지 겹치자, 농민들의 가슴은 말라붙은 논처럼 바짝 타들어간다. 작품은 서두에서 그 고통을 개미떼에 물어뜯기는 지렁이로 빗대며 강렬하게 암시한다.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가지고 바동바동 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 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잠시 멈추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 짓밟히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오롯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농민들의 설움과 분노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보여준다. 저수지를 트면서 보광리에는 물이 넘쳐나지만, 성동리 논에는 한 방울도 닿지 않는다. 아이가 산지기에게 쫓기다 죽고, 손자를 잃은 가동댁은 넋을 놓는다. 추수기에 보광사 승려들은 술판을 벌이며 대충 간평을 하고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책정한다. 읽다 보면, 자연 재해에 제도적 부조리까지 더해 없는 소작인들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비극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논마다 “입도차압” 팻말이 꽂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마침내 짚단과 콩대를 들고 절로 향한다. 철없는 아이들까지 “절 태우러 간다”고 따라붙는다.


“장정을 선두로 빈 짚단을 든 무리들은 어느새 벌써 동네 뒤 산길을 더위잡았다. 철없는 아이들도 행렬의 꽁무니에 붙어서 절 태우러 간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 모습은 무모해 보이지만, 동시에 벅찬 감동을 준다. 절망 속에서 끝내 붙잡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몸짓. 불을 지른다는 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자들의 마지막 언어이고, 억눌린 존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작품을 읽고 있으면 두 감정 사이를 오가게 된다. 끝없는 억압 속에서 짓눌린 농민들의 비극에 대한 연민, 그리고 끝내 꺾이지 않고 불을 지르겠다고 나서는 그들의 결기에 대한 통쾌함.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복잡한 감정이 오래 여운을 남긴다.


<사하촌>은 단순히 가난한 농민의 눈물을 기록한 작품이 아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저항을 보여준다. 그 저항의 몸짓 앞에서 묻게 된다. 지금 내 삶에서 ‘불지를 결심을 해야 하는 순간’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김정한이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 아닐까. 꺾이더라도 끝내 꺼지지 않는, 사람답게 사는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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