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나라말)
갈림길에 피고 진 꽃들
이름도 없는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라면 한국에서 초중고의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지나온 유년의 한때를 돌아보곤 한다. 스스로를 소녀의 자리에 올려놓고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첫사랑을 꿈꿔보기도 했던 때, 조금은 앳되고 청순한 얼굴로이었다면 햇볕에 그을린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과 같은 이를 만나 소녀처럼 조약돌을 던져보고도 싶었고, 함께 소나기도 맞아보며 앓아눕고도 싶었다. 소녀 같은 운명을 마음속에 그려보기도 하면서, 끝내 이뤄지지 않은 사랑을 가슴에 깊이 품고 싶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그런 작품이었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갈림길이다. 함께 걷던 길 끝에서 결국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 길은, 두 사람이 언젠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갈림길은 첫사랑의 설레는 만남조차 끝내는 이별로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풍경이다. 그것이 엇갈린 운명의 이별이었다면 그래도 가슴이 덜 아팠겠지만 사별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작품에는 갈대가 나온다.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지던 소녀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갈밭 사잇길로 들어서며 갈꽃을 꺾는다. 그리고 소녀가 이사 가기 하루 전날 소녀에게 호두알을 전달하지 못한 소년은 그리움과 불안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는다. 갈대, 갈대는 사랑의 연약함을 상징한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고 쉽게 꺾이는 갈대처럼, 소년과 소녀의 마음은 세상의 무게 앞에서 오래 견딜 힘이 없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든 흔들리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덧없음을 품고 있다.
이와 더불어 소녀와 소년이 산속에서 꺾어 모은 꽃들은 갈대와 닮은 또 다른 표징이다. 꺾인 순간부터 생명은 이미 시들고 구겨지는 꽃송이들, 결국 버려지고 마는 들꽃의 운명은 두 아이의 사랑이 지닌 허망함과 덧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갈대가 흔들림으로 연약함을 말한다면, 꽃은 꺾이고 짓밟혀 사라짐으로써 그 허무를 증언한다.
그러나 허약하고 덧없음 사이에 조약돌이 있다. 소녀가 소년에게 던진 조약돌은 장난처럼 보이지만, 소년의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 만져지며 살아남는다. 흔들리고 꺾여 사라지는 갈대와 꽃과는 달리, 조약돌은 단단하고 변치 않는 형태로 기억 속에 남는다.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자 영원의 상징이다.
이렇듯 「소나기」는 갈림길, 갈대, 꽃, 조약돌 같은 사소한 사물들을 통해 사랑의 운명과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야기는 결국 소녀의 죽음으로 닫힌다.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자라지도 시들지도 않는 사랑. 그것은 살아남은 이의 가슴속에만 남아, 오래도록 빛나는 상처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소나기」는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가슴을 적신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감정, 그러나 결코 오래 붙잡아둘 수 없는 감정. 그 덧없음을 죽음을 통해 정지시키고, 오히려 영원으로 남게 한다. 이렇게 죽음을 통해 첫사랑의 순수성을 완성시킨다. 이는「별」에서 죽음으로 어머니를 별과 같은 고귀한 이미지로, 누이는 미움의 감정으로 고정시키는 것과도 닮아있다. 결국 황순원의 문학에서 순수란 삶 속에서는 오래 지켜지지 못하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보존되는 아이러니한 가치로 드러난다.
이름도 없는 소년과 소녀, 끝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사랑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특정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의 가슴에도 스며들 수 있는 첫사랑의 얼굴로 남는다. 소년과 소녀는 소설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유년과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갈대처럼 쉽게 흔들리고, 꽃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던 감정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조약돌처럼 마음 깊숙이 남아 여전히 손끝으로 만져지는 추억이 있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는 작품 속의 인물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나의 지난 시간과 겹쳐져 여전히 살아 있다. 어쩌면 첫사랑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가지 못하기에 아름답고, 끝내 이뤄지지 않기에 더욱 오래 가슴속에 남는 것. 그래서 「소나기」는 가을날의 소나기처럼 한바탕 소란스럽게 쏟아졌다가 뚝 그치는 것처럼 강렬하게 지워지지 않는 노래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