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승무를 바라보는 자
조지훈의 「승무」
한밤의 승무를 바라보는 자
승무를 고등학교인지 중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을 때 피어났던 그 묘한 슬픔은, 속세를 떠났으나 아주 떠나지 못한 여인의 사연에서 오는 것이라 여겼다. 비구니의 춤이라는 설정, 하얀 고깔과 긴 소매, 밤과 별빛 같은 이미지가 겹치며, 자연스레 버리지 못한 사랑이나 단념하지 못한 삶을 떠올렸다. 어떤 사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인의 한(恨)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의 나는 승무의 비구니를 화자의 애인으로 이해했다. 화자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절로 들어간 여인이, 한밤중 홀로 승무를 추며 끊지 못한 세속의 고뇌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보았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시구가 바로 그런 정황처럼 느껴졌다. 속세의 인연을 끊었다고 하나 마음은 아직 별빛처럼 남아 있어 지워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혔고, 화자는 그 장면을 산사 어딘가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서러움에 잠긴 존재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둘의 관계를 꼭 그렇게 구체적인 서사로 엮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는 여인의 사정을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왜 절에 들어왔는지, 무엇을 버렸는지, 누구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 침묵한다. 오히려 시가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여인의 사연이 아니라,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시선이다. 읽을수록 덜 비극적이고, 대신 점점 더 고독해진다. 그 고독은 한밤의 정적 속에서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승무를 추는 여인의 고통은 이미 춤의 형식 안으로 스며들어 있다. 접고, 펼치고, 감고, 돌아서고, 다시 고요해지는 동작 속에서 감정은 해소되기보다 삼매의 상태로 옮겨진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빛’이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은 번뇌가 남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번뇌가 끝내 빛으로 바뀐 결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고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서러움은 여인의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춤추는 여인’의 내면시가 아니다. 겉으로는 비구니의 동작을 따라가지만, 시의 정서적 중심은 관찰자의 자리에 있다. 이 시는 고독한 수행자의 독백이 아니라, 한밤중에 그 고독을 목격한 사람의 감정 기록이다.
여인은 이미 자신의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통과시켰지만, 화자는 아직 그러지 못한 채 바라보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 시에서 가장 분명한 대비는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춤추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거리다. 화자 역시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의 춤을 보고 서러워하는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여인과 비슷한 고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여인의 춤에서 자신의 마음을 본 것이다.
그래서 화자의 서러움은 연민이 아니다. 너무 고와서 서럽다. 그 고움은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는 얼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삶의 표정이다. 사랑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 이미 사랑을 통과해버린 사람의 얼굴은 잔인할 만큼 또렷하다. 화자는 그 얼굴을 보며 깨닫는다. 자신의 번뇌를 춤으로 건너간 그 자리는,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자리다.
이렇게 읽고 나니, 이 시는 이뤄지지 않은 남녀의 이야기라기보다, 사랑을 끝내 정리하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정리해버린 세계를 잠시 목격하는 순간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승무는 여인의 서러운 개인사가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해 이루어진 화자의 자각이며, 그 자각의 감정이 바로 ‘서러움’이다.
그래서 「승무」는 슬프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서늘한 적막이 감돈다. 이 시에 남는 것은 여인의 눈물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독이다. 그리고 그 고독은 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을 끝내지 못한 자신을 너무 또렷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시는 그 밤의 절에서 결국 다시 속세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화자의 자리를, 우리 스스로의 자리로 겹쳐 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