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귀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소풍’이라는 단어가 삶의 다른 언어로 소환되는 천상병의 「귀천」을 알게 되면서, 유년의 소풍은 더 이상 가벼운 놀이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그날을 기다리며 설렜던 마음과 돌아올 시간을 어렴풋이 의식하던 불안,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까지—소풍은 이미 삶의 형식을 닮아 있었다.
천상병의 시가 일깨우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태도다. 소풍이란 마음껏 누리는 시간이면서도, 제자리를 망가뜨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떠남을 전제한 체류, 돌아감을 품은 기쁨. 그래서 「귀천」의 죽음은 이탈이 아니라 회귀가 되고, 삶은 다녀온 흔적으로 정리된다.
유년의 소풍이 새롭게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날의 설렘은 단순한 놀이의 기대가 아니라, 잠시 허락된 시간에 대한 감각이었음을, 돌아갈 곳이 있기에 가능한 기쁨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천상병의 시를 통과한 뒤에야 소풍은 비로소 삶의 은유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로 남는다.
하늘로 돌아가는 날, 그는 동무나 되듯 이슬과 손을 잡겠다고 한다. 새벽빛에 잠시 맺혔다 스러지는 존재와 나란히 걸어가겠다는 말이다. 노을빛과는 단둘이 기슭에서 놀다, 구름의 손짓을 받으면 돌아가겠다고도 한다. 붙잡힘도, 지연도 없다. 자연의 부름에 응답하듯 순서를 따른다.
그에게 귀천은 단절이 아니라 인사다. 다녀온 자의 말로 이 세상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서 말하겠다고 한다. 삶이 힘들지 않았다고도, 슬프지 않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웠다고. 그 한마디에 견딤과 체념, 기쁨과 상처가 모두 겹쳐 있다.
천상병의 「귀천」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예의가 된다. 이슬과 노을과 구름에게 작별을 건네는 방식으로, 그는 삶을 끝내지 않고 마친다. 소풍을 잘 다녀온 사람처럼, 세계를 배반하지 않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자연을 대동한 귀천의 장면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 마지막 시구가 유독 오래 남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이 말이 어떤 깨달음의 선언이나 초월의 언어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짐도 아니고 결론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말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천상병의 시는 순도 100%로 느껴진다. 거기에는 삶을 의심하는 지적 태도도, 세계를 해부하려는 냉소도 없다. 그렇다고 순진한 낙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끝까지 의심을 보류한 채 세계를 통과해 온 사람의 말에 가깝다. 그래서 이 시 앞에서는 회의나 의심을 품으려는 마음 자체가 어딘가 불순하게 느껴진다.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이 한 문장은 삶을 쉽게 긍정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힘들었고 아팠고 견뎌야 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겠다고 선택하는 태도. 그 선택의 무게가 이 시를 가볍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귀천」의 마지막은 감동이 아니라 신뢰로 남는다. 이 말이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마음. 이 사람이라면 삶을 그렇게 정리해도 되겠다는 마음. 천상병의 「귀천」은 독자에게 그런 신뢰의 징표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