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97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by 인상파

이상의 〈절벽〉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이상의 〈절벽〉을 읽다 보면, 이 시가 죽음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죽음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멈춘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자리, 절벽 앞에서 스스로 묘혈을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것은 추락의 장면이 아니라, 더 견딜 수 없음을 몸으로 먼저 아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이 시를 의식의 실험쯤으로 읽었다. 죽음을 가상으로 설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는 근대적 자아의 사유라고 말하면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읽을수록 시는 멀어졌다. 너무 안전했고, 너무 익숙한 평자들의 말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 시는 그렇게 매끈한 자리에 놓이기에는 지나치게 거칠고, 아프다.


어느 결에 나는 이 시를 병든 육신을 가진 존재의 자리에서 읽고 있었다. 그러자 말들이 달라 보였다. “꽃이보이지않는다”는 것은 세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또렷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의 상태처럼 느껴졌고, “향기가만개한다”는 말은 시각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마지막 감각의 과잉처럼 다가왔다. 감각의 질서가 흐트러진 상태, 몸이 먼저 한계에 도달했을 때의 세계였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는 구절도 그제야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삶을 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삶을 장식하던 것들까지 챙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순간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나는정말로눕는다”라는 문장은 자기 최면이라기보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몸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마지막 자세처럼 읽혔다. 몸이 먼저 알고, 말이 뒤따라온 문장이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종생기』가 떠올랐다. 그 작품에서도 무덤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은 미래의 장소가 아니다. 이미 살아 있으면서, 자신을 사후의 위치에 놓아 버린 화자의 자리다. 『종생기』와 〈절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죽어가는 자가 스스로를 매장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누구도 묻어주지 않고, 누구도 애도하지 않으며, 스스로 파고 스스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섬뜩하다. 이것은 외로움의 극단이 아니라,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상태, 자기는 혼자라는 감정마저 넘어선 절대고독의 죽음이다. 그 자리에는 슬픔도 항변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더 이상 누구를 부를 필요가 없게 된 존재의 정적뿐이다.


이상에게서 이런 장면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가 죽음을 동경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고자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죽음을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고, 위로나 구원의 언어로 번역하지도 않았다. 대신 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만 남겼다. 파고, 들어가고, 눕는 것. 그 단순한 동작들만으로, 그는 삶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지점을 기록했다.


이상을 읽으며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 시골 마을 깊숙한 산속에 있던, 다 헐어가는 무덤 앞에 서 있던 나의 모습이다. 그때 죽은 자와의 대화는 일방적이었고 돌아온 대답은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 생이 얼마나 허망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우울이나 허무주의라기보다, 너무 일찍 끝을 알아버린 사람의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종생기』와〈절벽〉을 읽고 있으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그것은 작품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비슷한 자리에 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이 서 있었던 절벽,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아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는 혼자 눕는 모습을 남겼고, 나는 그 모습을 이제서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은 삶을 견디는 법을 쓰지 않았다. 대신, 삶이 더 이상 견뎌지지 않을 때 인간이 어떤 자세로 남는가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 절대고독의 자세 속에서, 그는 끝내 살아남는 쪽을 택하지도, 완전히 사라지는 쪽을 택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무덤을 파고 혼자 눕는 법을 보여준다. 그것이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까지 지켜낸, 유일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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