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앓고 문은 안 열리고
이상의 〈家庭〉
집은 앓고 문은 안 열리고
이상의 〈家庭〉은 기시감을 불러오는 시다. 언제였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집이 앓는다’는 말과 그 집의 문을 열어 보려고 안쓰럽게 애쓰는 사람의 모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섞인 것인지 정확히 확인할 길 없이, 마음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에 다시 이상의 시를 읽으면서, 그 감각의 출처가 바로 〈家庭〉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시는 삶의 기본 단위인 가정이 아니라, 집이 앓은 상태를 보여주는 시다. 가정이 앓는다는 말이 사람 사이의 관계나 정서, 윤리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면, 집이 앓는다는 말은 그 결과가 이미 물리적 공간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뜻한다. 이상은 가정의 붕괴를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지붕 위에 서리가 내리고, 뾰족한 곳에 쇠처럼 달빛이 묻어 있는 풍경을 내세워, 생활의 열이 완전히 빠져나간 상태를 차갑게 보여준다. 이 집은 더 이상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 숨이 돌지 않는 공간, 앓는 몸처럼 굳어 버린 구조다.
그래서 이 집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생활이 없는 집, 관계가 사라진 가정 앞에서 화자는 문을 암만 잡아당겨 보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한다. 이때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화자의 무능이 아니다. 문제는 집 안쪽에 있다. 받아들일 생활이 사라진 집은, 아무리 애써도 사람을 들이지 못한다. 그 사실 앞에서 화자는 자신을 ‘收入’될 수 있는 존재로까지 낮춘다. 사람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화의 언어는 비굴함이라기보다, 끝까지 가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짓처럼 보인다.
이 집이 앓고 있다는 사실은 문장에서도 반복된다. 이 시는 띄어쓰기 없이 붙여 쓰여 있다. 물론 이상의 시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는 게 특징이다. 띄어쓰기 없이 이어지는 말들은 숨을 고를 틈을 주지 않는다. 띄어쓰기는 생활의 호흡이다. 말이 오가고,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리듬이다. 그러나 이 시의 문장은 그 리듬을 잃었다. 의미들이 덩어리로 붙은 채 밀려오고, 독자는 숨이 막히듯 읽게 된다. 이는 우연한 표기나 시대적 관습이 아니라, 생활이 빠져나간 가정의 상태를 문장의 호흡으로 체험하게 하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집이 앓듯, 문장도 숨을 고르지 못한다.
시각적으로도 이 붙여 쓴 문장들은 인상적이다. 간격 없이 이어진 글줄은 마치 앓는 집이 몸을 움츠린 채 버티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문밖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화자의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은 닫혀 있고, 문장은 그 앞에서 계속 밀착된 채 버텨 선다. 집의 상태, 화자의 상태, 문장의 상태가 서로 겹치며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집이 앓는다’는 감각을 문학적으로 실감한 경험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을 때였다. 마지막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철거반에 의해 무너지는 난쟁이 가족의 집은, 철거라기보다 살해에 가까운 방식으로 쓰러져 간다. 그 장면을 읽으며 집도 아플 수 있겠구나 하는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경험은 이상이 말하는 ‘집이 앓는다’는 표현을 더욱 실감 나게 받아들이게 했다. 사람이 떠난 뒤에 무너지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 안에 있는데도 병들어 가는 집의 감각 말이다.
이 시에서 집이 앓는 것만큼이나, 그 앓는 집의 문을 열어 보려 애쓰는 화자의 모습에도 마음이 기운다. “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 매어달렸다.” 열리지 않는 문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보며, 개인의 불행보다도 세상이 아프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생활이 없는 가정, 그 가정이 깃들어야 할 집이 누군가의 수명을 헐어 저당 잡힌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 그 앞에서 화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채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다. 우리는 모두 아픈 것일까 아니면,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상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개인의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가장 안쪽이어야 할 공간마저 병들어 버린 세계의 초상이다. 집이 앓고, 그 집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이상 어디에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시대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시는 지금도 유효하다. 앓는 집 앞에서, 여전히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는 존재들의 모습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