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에 남은 초생달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시 ‘바다와 나비’ 전문)
허리에 남은 초생달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는 깊게 읽고 싶은 시다. 뭔가를 잔뜩 담고 있는 시 같은데, 실제로 보면 너무 단순하다. 그래서 실망스럽다. ‘바다와 나비’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대상을 끌어와 시상을 전개하지만, 결국 나비가 바다를 청무밭으로 착각해 날아갔다가 날개를 절여 돌아온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정도면 시가 쉽다는 평가를 받아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시는 마지막 시행에서 잠시 독자를 멈춰 세운다.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라니. 허나 이 또한 전혀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 연약한 존재의 몸에 미성숙한 빛을 얹는 일은 시에서 자주 쓰여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미지마저도 얼핏 보면 예쁘고 상징적인 장치로 읽히며, 시 전체의 단순함을 뒤집을 만큼 결정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이 단순함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기림은 바다의 깊이를 설명하지 않고, 나비의 감정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바다는 끝까지 바다로 남아 있고, 나비는 끝내 무엇을 깨달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시는 의미를 부풀리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멈칫하도록 내버려 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시의 중심에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 있다. 나비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도전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려가고, 날개가 절여지고, 지쳐 돌아온다. 실패라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성취라 말하기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귀환이다. 그러나 바로 이 애매한 상태야말로 아이의 성장에서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과 닮아있다.
아이는 세계를 청무밭처럼 본다. 푸르고 열려 있으며, 들어가도 괜찮을 것처럼 보이는 공간. 아무도 수심을 일러주지 않았기에 위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얕고 어디부터가 위험한지, 무엇이 밟아도 되는 땅이고 아닌지 가르쳐주려 해도 아이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에게 세계는 언제나 먼저 색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배운 뒤에 움직이지 않고, 움직인 뒤에 배운다. 그 과정에서 날개가 찢어지지는 않지만, 이전처럼 가볍게 날 수 없게 된다. ‘절인다’는 말이 정확히 그 상태를 가리킨다. 상처라기보다 감각의 변화, 몸이 먼저 기억해버린 세계의 짜고 쓰린 맛이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에 남는 이미지는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이다. 아직 차오르지 못한 달, 푸르러서 더 차가운 빛. 이 이미지는 성장의 상태를 정확히 말해준다. 아이는 다 컸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아직 자라는 중이다. 그래서 그 빛은 완성의 빛이 아니라 과정의 빛이다. 따뜻하지 않아서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빛이다. 성장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라면서도 여러 번 나비가 되고, 여러 번 바다를 밭으로 착각한다. 다만 점점 수심을 짐작하게 될 뿐이다.
〈바다와 나비〉가 단순해 보이면서도 자꾸 다시 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시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우리가 이미 한 번쯤 지나온 감각을 정확히 건드린다. 세계를 오해한 적이 있는 기억, 기대와 현실이 처음 어긋났던 순간, 그리고 그 이후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몸으로 돌아왔던 경험. 이 시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다만 한 장면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