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는 죽어서
한하운의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러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나는 나는 죽어서
한하운의 〈파랑새〉는 어릴 적 자주 마주쳤던 시다. 공책인지 책받침인지, 일기장 같은 데서 만났던 것 같다. 짧고 경쾌한 리듬을 지닌 시라 금세 머릿속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곤 했다. 시골에서는 파란빛의 새를 거의 본 적이 없어 파랑새라는 존재 자체가 신비롭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동화 속 파랑새가 떠올라 이 시를 명랑하고 발랄한 노래로 받아들였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파랑새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창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파랑새, 푸른 하늘, 푸른 들, 푸른 노래, 푸른 울음으로 이루어진 이 푸르른 세계는 눈으로 펼쳐지기보다 귀로 먼저 진동한다. 여기서 푸름은 색이 아니라 음색에 가깝다. 맑고 밝은 소리라기보다는 깊고 낮게 스며드는 울림이다. 노래와 울음이 구분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울음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전해지지 못하면 다시 울음으로 남는다. 파랑새가 푸른 하늘과 푸른 들을 날아다닌다는 말은, 그가 세계를 가로질러 자신의 소리를 흩뿌린다는 뜻이다. 살아서는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를 죽어서야 비로소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다짐. 이 시의 파랑새는 날개보다 먼저 목소리를 얻은 존재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사람이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야 했던 한센병 환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이 시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파랑새가 되고 싶다는 말보다 ‘죽어서’라는 단어 앞에서 목이 콱 막힌다. 이 시어는 시의 정조를 단숨에 뒤집는다.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라는 말은 낭만적 변신의 선언이 아니라, 살아서는 끝내 허락되지 않았던 세계로 건너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하늘과 들을, 새의 몸으로라면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던 한 존재가 품을 수 있었던 상상이다.
그렇다면 왜 ‘푸른’ 노래와 울음일까. 푸름은 푸른 얼굴, 푸른 상처, 푸른 멍처럼 너무 오래 눌려 소리조차 내지 못한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색이다. 감정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 울음이 노래가 되기 직전, 노래가 다시 울음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색. 색깔보다 소리가 먼저 들리는 이 시는 슬픔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단아하고 경쾌한 음보 속에 슬픔을 숨긴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볍게 읽히고, 동요처럼 귀에 남는다. 파랑새라는 말이 불러오는 익숙한 이미지는 독자의 경계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그 리듬 위에 얹힌 말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면,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를 말하지 않는다. 화자는 살아서 무엇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를 말한다.
그는 파랑새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죽어서 파랑새가 되겠다고 말한다. 이 시의 초점은 파랑새가 아니라 ‘죽어서’에 있다. 파랑새는 목표가 아니라 조건의 변화 이후에야 가능한 형식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존재 방식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인식이 이 짧은 시를 끝까지 지배한다.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되고 싶을까. 한때는 유치환의 〈바위〉처럼 “애련에 물들지 않고 / 희로에 움직이지 않는” 한 개의 바위가 되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 그러나 살아오며 알게 되었다.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애련과 희로를 모르고 지나가거나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의 나는 바위보다는 파랑새에 더 가까운 질문을 붙잡고 있다. 날 수 없었던 삶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울고 노래하겠다는 존재. 그것이 희망이어서가 아니라, 살아서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죽어서 무엇이 되느냐는 질문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되묻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한 채 오래 망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