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羅道 길>을 결국 읽다
한하운의 <全羅道 길>
-小鹿島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전라도길.
<全羅道 길>을 결국 읽다
소록도에서 아주 가깝지도,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동네에서 살았지만, 고향에서 살 때는 소록도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그러다 유학을 갔던 도시의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읍내 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알게 된 원불교를 통해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의 소록도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관광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은 달랐다. 잘 다듬어진 길이었음에도, 거리마다 말로 다 전해지지 않은 슬픈 사연들이 가라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길에는 분명 무거운 기운이 깔려 있었다.
이후 다시 도시로 나와, 한 살 어린 후배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니며 문학 시간에 소록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을 때, 소록도는 비로소 더 피부에 와 닿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더 이상 한 번 다녀온 섬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 그리고 오랜 고통이 축적된 공간으로 다가왔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무심코 튀어나오는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몇 번 곤욕을 치른 뒤로 나는 점점 말을 줄이게 되었다. 말투를 고치고, 억양을 누르며, 전라도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말은 그때부터 나에게 고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먼저 설명해야 하고 때로는 숨겨야 하는 이름이 되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고, 굳이 묻지 않아도 될 말을 먼저 꺼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끝에 묻어나는 사투리는 고치려 애쓸수록 더 도드라졌고, 나는 점점 말을 줄이는 쪽을 택했다. 말하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하운의 <全羅道 길>은 '전라도'라는 말이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로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시였다. 이 시에는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고향의 정겨움으로 남아 있지 않고, 한 인간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로로 또렷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황토의 붉은 길은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숨막히는 열기로 화자를 몰아세운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길, 목적지는 분명하지만 도착이 위안이 되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발가락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남은 것은 두 개뿐이다. 그 두 개의 발가락으로 끝까지 가야 하는 신세라는 말 앞에서, 이 시의 걷기는 이동이 아니라 소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나아갈수록 인간의 형체는 닳아간다. 이 시에서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며 써버려야 하는 것이다.
‘수세미같은 해’가 아직도 저물지 않았다는 구절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해가 남아 있다는 말은 여지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더 걸어야 하고, 더 드러나야 하고, 더 초췌해진 상태로 견뎌야 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확인이다. 이때의 볕은 고통 그 자체다. 사람의 외양을 문드러지게 하여 드러내고,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빛이기도 하다.
천안삼거리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 길은 더욱 잔인해진다. 갈림길이라는 형식은 선택을 암시하지만, 화자에게 허락된 방향은 이미 하나뿐이다. 민요 속에서 흥겹게 불리던 이름이 여기서는 오히려 되돌릴 수 없음의 통보처럼 들린다. 열린 길처럼 보였던 장소에서 닫힌 길을 확인하는 순간, 전라도 길은 개인의 이동 경로가 아니라 사회가 한 인간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구조가 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전라도라는 이름이 더 이상 지명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무게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시가 불편했던 이유는 병이나 고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라도 길은 그렇게, 한때 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이 된다.
그 길은 특정 지역의 풍경이 아니라, 사회가 불편함을 느끼는 존재들을 어떻게 바깥으로 밀어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경로다. 병든 몸을 숨기게 만들고, 말투를 고치게 만들고, 태생지를 설명하게 만들었던 시선들이 그 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그래서 전라도 길을 따라 걷는 화자의 고통은 개인의 불행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가 만들어 낸 질서의 결과이며, 누군가는 반드시 감당해야 했던 몫이다. 이 길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이고, 알게 된 이상 이전처럼 쉽게 외면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전라도 길은 그렇게, 과거의 이야기를 건네면서도 지금 우리의 자리와 태도를 묻는 길로 남는다. 읽는 사람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나는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구조에 무관한 사람인가?
전라도라는 이름, 병든 몸, 격리의 길을 여전히 남의 일로 둘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