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은 마음
정지용의 <춘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루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은 마음
〈춘설〉은 풍경을 펼치기 전에 먼저 몸을 깨운다. 문을 열자 선뜻, 먼 산이 보인 것이 아니라 이마에 차갑게 와 닿는다. 시각보다 앞서는 촉각, 인식보다 앞서는 몸의 반사다. 춘설은 그렇게 의식 이전에 몸을 건드린다. 그리고 곧이어 화자는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를 마주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단계가 있다. 처음은 ‘차갑다’는 충격이고, 다음은 그 차가움을 통과한 뒤에 남는 ‘서늘함’이다. 차가움은 움찔하게 하지만, 서늘함은 몸에 남는다. 그 서늘함 위에서 이마는 빛난다. 감각이 또렷해졌다는 신호다.
봄눈으로 잠깐 계절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생명은 여전히 요동친다. 얼었던 물은 금이 가고, 봄바람이 느껴지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다.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다니, 이는 춘설로 계절이 잠시 되돌아간 듯 보여도 생명은 이미 방향을 틀었고, 그 기운이 몸과 옷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러니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일 수밖에 없다.
그게 굳이 꿈 같고 서러운 까닭은, 옹송그리고 있다기보다 옹송그리고 살아난 듯하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살아났다고 말하기에는 이르고,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상태다. 그런 무정형의 상태는 손에 잡히지 않아 어렴풋하고, 어렴풋하기에 꿈 같다. 그리고 꿈 같기에 더 서럽다. 분명 살아나고는 있지만, 다시 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막 살아난 생명이 다시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읽힌다. 봄이 왔다고 선언하지도 않고, 겨울이 끝났다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막 살아난 생명이 다시 움츠러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연약함을 알아보는 마음이 ‘꿈 같기에 설어라’라는 탄식으로 남는다. 이 서러움은 절망이 아니라, 너무 이른 희망이 혹여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가깝다.
〈춘설〉에서 봄은 이렇게 온다. 차갑게 이마에 닿았다가 서늘함으로 남고, 그 서늘함 속에서 향기가 배어 나오며, 끝내는 살아난 것들이 다시 움츠러들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그런 자연의 움직임 앞에서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하며, 계절을 앞서 판단하거나 막아서기보다 그 변화의 결을 그대로 몸으로 맞이하려 한다. 그것은 봄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아직 꿈 같은 생명의 기척을 조심스레 지켜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춘설은 계절을 뒤집는 눈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던 계절이 잠시 되돌아와 몸의 감각을 깨우는 순간이다. 이 태도는 우리 인생에도 끼어든다. 어둡고 추웠던 시절을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고, 견디며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삶이 조금 느슨해졌을 때, 문득 그 시절의 감각이 떠오른다.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만 가능했던 또렷함. 몸소 경험했던 생생함. 아프면 아픈 줄 알았고, 추우면 추운 줄 알았던, 감각이 살아 있던 때 말이다.
우리는 가끔 다시 겪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 감각을 지녔던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너무 매끈하고 나른한 일상에서 차라리 한 번 더 서늘해지고 싶어진다. ‘핫옷’은 안전하지만 동시에 차단이기도 하다. 그것을 벗고 싶다는 말은 보호를 거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삶을 어중간하게 느끼느니 차라리 더 매섭고 정확히 느끼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그러니 때로는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라는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