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늙은 교사, 그리고 나
이한직의 <낙타〉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차리를 드시고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는 어린 때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듯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1939, 『문장』)
낙타와 늙은 교사, 그리고 나
내 경험치에서 암컷 고양이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암컷 같지가 않다. 그냥 수컷으로 보인다. 그것은 뺨에 수염을 달고 있어서다. 암컷이었던 우리 집 뭉크와 눈싸움을 하다가 나는 그만 피식 웃곤 했다. 수염을 달고 있는 주제에 암컷 노릇을 하는 꼴이 우스운 것이다. 성별이라는 구분은 분명한데, 눈앞에 놓인 형상은 그 구분을 자꾸 어긋나게 만들었다.
이한직의 〈낙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긋남이라기보다 오히려 묘하게 들어맞는 감각을 느꼈다. 낙타라는 동물은 호감의 대상도, 그렇다고 위협의 대상도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콧김을 내뿜고, 되새김질을 반복하며,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은 어딘지 피로하고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내 기억 속 시골 늙은 남교사의 형상이었다.
후줄근한 양복을 걸치고 머리는 허옇게 세어, 회초리와 출석부를 들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모습. 아이들 쪽으로 쉽게 다가오지 않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교단 위에 서 있던 존재. 낙타의 무표정한 얼굴과 굽은 등은 바로 그런 교사의 거리와 닮아 있었다. 친근하지도,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은 존재. 늘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존재라는 점에서 두 형상은 겹쳐진다.
이 시에서 낙타는 그런 형상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유년의 눈으로 이미 ‘다른 종의 생물’처럼 인식되었던 교사의 모습을 다시 불러오는 장치이며, 외형이 인식을 결정해 버리는 기억의 방식에 대한 은근한 고백처럼 읽힌다. 암컷 고양이의 수염이 성별의 구분을 흐리듯, 낙타의 생김새는 늙은 교사의 권위와 노쇠, 그리고 접근 불가능한 거리를 한꺼번에 환기한다. 이 시가 그토록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경험 속에서 이런 정확한 겹침의 순간들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가 낙타에서 선생님을 떠올리는 이유는, 두 존재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거리감 때문으로 보인다. 회초리를 들고 교단 위에 서 있던 교사는 아이의 세계와 같은 평면에 있지 않았고, 늘 한 발짝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였다. 어린 학생에게는 경계 너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교사가, 동물원 울타리 너머에 있는 낙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거리감이 세월을 통과하며 노쇠와 겹쳐질 때, 낙타와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형상으로 포개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 이미지가 회상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자는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낙타를 바라본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그 거리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한때는 올려다보던 존재의 자리에, 어느새 자신이 서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기시감은 개인적 기억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 시간 감각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이 놓이는 ‘동물원의 오후’는 단순한 시공간 배경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동물원은 생명들이 살아 있으되, 더 이상 제 삶의 맥락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공간이다. 각 존재는 저마다의 우리 안에 배치되어 있고, 그 삶은 이야기라기보다 풍경에 가깝다. 화자는 그 풍경 속에서 낙타를 바라본다. 낙타는 움직이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시간을 견디고는 있지만 새로운 시간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런 공간에서 ‘오후’라는 시간대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오후는 시작을 이미 지난 시간이자 아직 끝에 이르지는 않은 어중간한 시점이다. 한때는 활력이 있었으되, 이제는 유지와 반복의 리듬으로 기울어 가는 시간. 낙타의 느린 몸과 늙은 교사의 모습이 이 시간대에 놓일 때, 그것들은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삶의 한 국면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읽힌다.
화자는 동물원의 오후에 서서, 이미 여읜 동심의 옛이야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풍경을 바라본다. 그 기억들은 더 이상 하나의 서사로 복원되지 않고, 동물원의 우리들처럼 흩어져 배치된 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그것을 다시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다만 그 파편들이 놓여 있을 법한 자리를 알아보고, 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의 쓸쓸함은 회상이나 그리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시간을 통과하며 점차 가까이할 수 없는 쪽, 말보다 침묵이 많은 쪽, 미래보다 과거를 더 자주 되새기는 쪽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림으로써 생기는 감정이다. 화자 자신 역시 언젠가는 낙타처럼, 늙은 교사처럼, 동물원의 오후에 배치된 존재가 될 것임을 예감하는 데서 온다. 동물원은 결국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다가올 화자 자신의 자리를 미리 비춰 주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