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18

빈 가지에 남은 소녀

by 인상파

오일도의 <내 소녀>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1935, 시원)



빈 가지에 남은 소녀


오일도의 짧은 시 〈내 소녀〉는 이상하게 가슴을 오래 붙들어 놓는다. 빈 가지에 매달린 바구니가 薄紗의 아지랑이 속에서 흔들리는 장면은 그 바구니를 요람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바구니의 주인인 소녀의 소식을 궁금하게 만든다. 빈 가지에 바구니를 걸어 두고 소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빈 가지의 바구니, 그리고 “어디 갔느뇨”라고 묻는 화자의 독백에는 이미 깊은 고독이 서려 있다.


오일도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으로, 김소월이나 정지용처럼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순수시 전문 잡지라 할 수 있는 『시원(詩苑)』을 사재를 털어 창간하며 시가 설 자리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이다. 시대의 중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시가 놓일 자리를 마련하는 쪽을 택한 시인. 그런 태도는 그의 시만큼이나 절제되어 있다.


다섯 행의 작품에서, 둘째 행과 셋째 행 사이에 놓인 말줄임표는 마치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 커튼 뒤에서 ‘박사의 아지랑이’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가. 이 시 속의 소녀는 이름이 없다. ‘영희’도, ‘순이’도 아닌, 그저 소녀다. 그런데 이 소녀는 ‘내 소녀’다. 나에게만 속한 소녀, 현실의 한 인물이 아니라 화자의 기억과 마음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오일도의 〈내 소녀〉는 도회지의 소녀라기보다 시골 소녀로 읽힌다.


첫 장면,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의 주체는 ‘내 소녀’다. 화자가 소녀의 행방을 몰라 묻는다기보다, 이미 사라진 소녀를 향해 던지는 탄식처럼 들린다. 빈 가지에 걸어 둔 바구니라는 말에서, 나물을 캐러 갔다가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잠시 스치지만, 가지가 ‘빈’ 것으로 보아 아직 푸성귀를 캘 철은 아닌 듯하다. 빈 가지란 봄의 새싹도, 여름의 녹음도, 가을의 열매도 모두 떨어진 나목의 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빈 가지에 바구니가 달랑거리는 풍경은 주인 잃은 물건이 지닌 쓸쓸함을 떠올리게 한다. 자취도 없이 떠나버린 소녀의 행적은 숱한 점의 말줄임표로 이어지고, 그 점선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라도 한 듯, 혹은 베일에 숨겨야 할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풍경으로 머문다. 그렇게 말줄임표는 곧 박사薄紗의 아지랑이라는 형상으로 치환된다.


박사는 속이 비치지만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는 천이고, 아지랑이는 분명히 보이지만 잡을 수 없으며 형태는 있으나 실체는 없다. 박사의 아지랑이는 소녀의 부재를 완전히 확정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지도 않는 묘한 경계선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소녀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이며, 동시에 화자와 소녀 사이의 거리다. 그러니 박사의 아지랑이는 소녀의 흔적을 들추면서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투명한 간극이기도 하다.


예사롭지 않은 빈 바구니. 비바람에 세월을 좀 먹으며 흔들리는 그 바구니는 이 소녀가 이미 이 세계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는 뜻일 터다. 그리고 그 장면 뒤에 놓인 무한한 말줄임표는 薄紗의 아지랑이를 시각화하며, 소녀와 화자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화자는 물론 독자까지도 여전히 아른거리는 “薄紗의 아지랑이” 속에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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