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19

사랑이 밥먹여준다지만,

by 인상파

톨스토이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밥먹여준다지만,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이라는 인상 때문에 처음부터 큰 호감을 갖기 어려웠다. 원불교에서 불교, 기독교, 가톨릭에 이르기까지, 종교라는 것에 한 번쯤은 입문해 보고자 교당도 다니고 성당 문턱도 넘나들어 보았지만, 끝내 어느 하나에도 귀의하지 못했다. 신심이 부족하다는 말로 정리하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불교적 정서를 품고는 있지만, 제도 종교로부터는 한 발 비켜 서 있는 무교도에 가깝다.


더욱이 성경을 교리의 중심에 두고 ‘사랑’을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종교 앞에서는, 그 사랑을 믿어보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고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했다. 조건 없는 사랑, 계산 없는 희생, 무한한 용서를 전제로 하는 신의 사랑은, 삶을 살아내는 일상의 감각과는 언제나 어긋나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에서라면, 아무리 한 발 물러서 생각해도 가장 그럴듯한 답은 결국 ‘돈’일 것이다. 생존과 안정, 선택의 자유까지 대부분이 화폐를 매개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돈은 삶의 조건이자 언어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그 자명해 보이는 답을 정면으로 비껴간다. 이 작품이 여러 일화를 통해 집요하게 역설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 임박한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계산을 동반하지 않는 돌봄.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말로 수렴된다.


문제는 그 사랑이 언제나 대가 없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불편해진다. 그 사랑을 실천하기에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뿐 아니라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 연민,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돌봄 앞에서 독자는 감동보다 먼저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이 이 작품을 대하는 불편함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작품 초반부부터 성경에서 중요시하는 ‘사랑’이라는 덕목을 끌어들여 작품의 색채를 강화하며 교훈을 앞세우고 있는 점에서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리 알려주고 있어 흥미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궁핍한 구두장이 쎄몬이 외상값을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며 혼자 내뱉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은 지금 여기의 내 모습을 그대로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교훈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교훈이 가장 멀어 보이는 삶의 자리에서 인간이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바뀐다.


그토록 가진 것이 없는 쎄몬이, 남들의 편의는 당연히 봐주어야 하면서도 정작 그들보다도 더 가진 것이 없는 자신에게는 아무도 편의를 봐주지 않는 현실에 품는 불만은 그대로 내 목소리로 들렸다. 외상값을 받으러 다녔지만 끝내 제대로 손에 쥔 것은 없고, 겨우 얻은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각 앞에서 속이 상해 술 한 잔을 걸친 채 집으로 돌아오던 길, 작은 교회 근처에서 벌거벗은 사람을 목격했을 때 쎄몬이 겪는 심리적 갈등도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수없이 되풀이해 온 마음의 파동이었다.


“가까이 가면 벌떡 일어나 내 목을 조를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죽는 거지. 목 졸려 죽지 않더라도 아마 저 사람 일에 말려들 거야. 헌데 저 벌거숭이 남자를 어쩌면 좋담? 내 옷을 벗어 줄 수도 없고, 이대로 가 버리자!”


이 망설임은 비겁함이라기보다 생존의 본능에 가깝다. 이미 충분히 궁핍한 사람이, 더 잃을 것이 없다고 느낄수록 타인의 불행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쎄몬의 내면에서는 곧 다른 목소리가 올라온다.


“대체 무얼 하는 거야, 너는?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해서 죽어가는데 겁이 나서 그냥 가 버리려 하다니. 네가 큰 부자라도 된단 말이냐? 재산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나는 거야? 그건 좋지 않아, 쎄몬!”


이 목소리는 도덕의 명령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에 가깝다. 쎄몬은 선해서 멈춰 선 것이 아니라, 이대로 지나쳐 버린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래서 이 장면은 교훈적이기보다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다. 두려움과 계산, 자기연민을 모두 안고 있으면서도, 못 본 체하지 못한다. 그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쎄몬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읽고 있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독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면서, 벌거숭이 남자 미하일이 하느님의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닫고 돌아가야 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 세 가지 답은 설교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속 일화들을 통해 드러난다. 가난한 구두장이 쎄몬의 아내가 벌거숭이 미하일을 내치려다 끝내 마음을 돌리는 장면, 당장 그날 밤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이면서도 일 년 동안 닳지 않고 변형되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며 고압적으로 구는 부유한 신사와, 제 자식은 살리지 못했지만 이웃집 두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워낸 여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일화들을 통해 미하일이 깨닫게 된 것은 분명하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자기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알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인간은 제 걱정이 아니라 타인의 사랑과 돌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그 깨달음을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궁핍하고 가장 두려운 순간의 인간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는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끝까지 묻는다.


걱정 없이 사는 날은 없다. 우리는 늘 지금 당장을 걱정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그 걱정을 줄이기 위한 계획까지 세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삶이 눈에 띄게 나아진 적은 거의 없다. 걱정은 나를 살리기보다 오히려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버텨오게 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언제나 나와 관계 맺어 온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그 사실을 감상적으로 위로하지 않고, 불편할 만큼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그 깨달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나는 다시 걱정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해졌다.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걱정 덕분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다는 것을. 그 모든 분들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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