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21

연잣간, 또 하나의 모닥불

by 인상파

백석의 <연잣간>


달빛도 거지도 도적개도 모다 즐겁다

풍구재도 얼럭소도 쇠드랑볕도 모다 즐겁다


도적괭이 새끼락이 나고

살진 쪽제비 트는 기지개 길고


홰냥닭은 알을 낳고 소리 치고

강아지는 겨를 먹고 오줌 싸고


개들은 게모이고 쌈지거리하고

놓여난 도야지 둥구재벼 오고


송아지 잘도 놀고

까치 보해 짖고


신영길 말이 울고 가고

장돌림 당나귀도 울고 가고


대들보 위에 베틀도 채일도 토리개도 모도들 편안하니

구석구석 후치도 보십도 소시랑도 모도들 편안하니



연잣간, 또 하나의 모닥불


백석의 시에는 음식과 우리가 미처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들이 어엿한 이름을 얻어 불려 나온다. 그 순간 음식과 사물은 배경에서 빠져나와 하나의 존재로 자리를 얻는다. 돌나물김치, 백설기, 인절미, 송구떡, 무이징게국, 도토리묵, 도토리범벅, 국수 같은 음식들, 헌신짝과 소똥, 갓신창, 개니빠디, 짚검불 같은 무용해 보이는 물건들, 후치와 보습, 쇠스랑 같은 농기구들은 쓰임을 다한 사물이 아니라 삶을 함께 건너온 동반자로 시 속에 들어온다. 이렇게 불려 나온 존재들은 사람과 나란히 서며, 느슨하지만 분명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이러한 세계관은 〈연잣간〉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잣간은 연자매를 돌려 곡식을 찧던 방앗간이지만, 시 속에서는 노동의 과정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달빛과 거지와 도적개, 홰냥닭과 강아지, 송아지와 까치, 말과 당나귀가 차례로 등장한다. 더 나아가 대들보 위의 베틀과 차일, 토리개, 구석구석의 후치와 보습, 쇠스랑 같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도들 편안하니”라는 말 속에 포함된다. 연자매가 실제로 도는 장면은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이 이미 사람과 동물과 사물이 한자리에 모여 살아온 공동체였음은 분명하다.


연잣간은 인간의 노동, 동물의 힘, 자연의 리듬이 맞물려 돌아가던 공존의 현장이다. 그곳에서는 귀하고 천한 것, 주인과 도구,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구분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 누가 무엇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사실이다. 그래서 연잣간은 단순한 노동 공간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이 삶의 관계로 조직되던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읽힌다.


이 연잣간의 풍경은 백석의 〈모닥불〉과도 깊이 닿아 있다. 〈모닥불〉에서는 새끼오리와 헌신짝, 소똥과 갓신창 같은 것들이 불에 타들어 가고, 그 불빛 주위로 재당과 초시, 늙은이와 더부살이 아이, 갓사둔과 나그네, 큰개와 강아지까지 몰려든다. 신분과 처지, 사람과 짐승의 경계는 모닥불 앞에서 무력해진다. 노동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잣간과 모닥불은 닮아있다. 두 공간 모두 차별을 두지 않는 온정의 자리다. 하나는 연자매의 리듬으로, 다른 하나는 불의 필요로 공동체를 묶어 세우지만, 두 시가 보여주는 세계의 원리는 같다. 이름을 불러 세우고, 함께 머물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시편들은 〈멧새 소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이 보여주는 고립과 고독의 정조와는 분명히 다른 결을 지닌다. 후자의 시들에서 화자는 대개 홀로 서 있으며, 사랑과 구원은 끝내 닿지 않는다. 닫힌 방과 유랑의 길 속에서 화자는 고적한 상태로 머문다. 그러나 〈연잣간〉과 〈모닥불〉에서는 ‘나’가 중심에서 물러나고, 대신 함께 있는 존재들의 소란과 기척이 전면에 놓인다. 고독의 기운이 생물과 무생물의 공동체 속에 잠시 묻힌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차이는 백석의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작용한다. 고독의 시편들은 독자를 한 사람의 방과 길 위에다 홀로 남겨 두지만, 〈연잣간〉과 〈모닥불〉은 독자를 그 공간 안으로 불러들인다. 연자매 곁이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름 불린 존재들 사이에 조용히 섞이게 한다. 이 시들을 오래 붙들게 되는 이유도 위로의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차이는 노천명의 〈연잣간〉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노천명의 연잣간이 돌방아를 메고 도는 말과 연자지기, 닭 울음과 아이들 소리를 통해 이미 지나가 버린 농촌의 정경을 정답고 서정적으로 불러오는 기억의 풍경이라면, 백석의 연잣간은 여전히 작동 중인 듯한 현재 진행형의 삶의 질서를 보여준다. 하나가 회상의 공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생활의 공간이다. 같은 연잣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리와 거리의 차이가 시의 온도를 전혀 다르게 만든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1920~30년대는 일제의 토지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늘어나며 농촌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백석은 연잣간과 모닥불을 통해 사람과 동물과 사물이 구분 없이 어울리던 삶의 형식을 시 속에 보존한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감지한 언어다.


시골에 기계로 돌리던 방앗간의 풍경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이 시가 주는 따뜻한 온기는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모터 소리와 곡식 냄새, 방앗간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아이들과 강아지들의 모습이 시 속 연잣간과 겹쳐지며,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 삶의 방식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자유글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