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기시감
서정주의 〈復活〉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 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수나, 이것이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드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오고……촉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린지, 한번 가선 소식 없든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수나! 수나! 수나!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상실의 기시감
〈復活〉이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문을 여는 “내 너를 찾아왔다.”라는 시구부터, 이 시는 그 예상을 가볍게 비켜선다. 어디 맡겨 두었다가 마땅히 되찾으러 온 사람처럼, 이 말에는 단호함과 당당함이 함께 배어 있다.
머리카락, 촉불, 돌문, 강물처럼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미지들은 이 시가 기독교적 부활의 세계라기보다, 오히려 무속의 세계와 더 가까운 감각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내 너를 찾아왔다.”라는 말투 역시, 죽은 이를 불러내는 무당의 목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 죽은 이를 향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잠시 자리를 비운 존재를 다시 만나러 온 사람의 어조에 가깝다.
이처럼 죽음과 재회가 겹쳐진 어조 속에서 드러나는 당당함은, 이 시의 ‘부활’이 기적이나 초월의 사건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은 관계가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순간, 상실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은 관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다.
화자는 수나를 찾아 종로를 걷는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한 사람의 수나가 아니다.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라는 고백처럼, 수나는 거리 곳곳에서 겹쳐진 얼굴로 나타난다. 이는 환영이라기보다, 상실 이후에도 정리되지 않은 감각이 현재의 공간을 점령하는 방식에 가깝다. 수나는 하나의 형상이 아니라, 종로라는 공간 전체에 흩어진 흔적이 된다.
“새벽 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이 그리움이 특정한 순간의 회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루의 시작마다 되살아나는 이 감정은, 화자가 수나를 떠나보냈음에도 여전히 그 상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꽃상여가 산을 넘어간 뒤, 화자의 눈동자 속에 남은 것은 “빈 하늘”뿐이다.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남지 않은 자리에 자꾸 내리는 비는, 대상 없는 슬픔처럼 느껴진다. 이 비는 울음이지만, 누구의 울음인지 분명치 않다. 상실이 형태를 잃고 일상 속으로 스며든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실은 무지개처럼 다시 내려온다. 종로 네거리에서 열아홉, 스무 살쯤 되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핏대와 가슴속에 흩어져, 수나는 다시 화자 앞에 선다. 수나가 그쯤의 나이에서 세상을 등진 모양이다. 이때의 부활은 죽은 이를 되살리는 사건이 아니라, 보냈으나 보내지 못한 존재가 현재형으로 되돌아오는 기시감의 순간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시에서 말하는 부활은 이미 떠나보냈다고 믿었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현재의 풍경 속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상여는 산을 넘었고, 시간은 흘렀지만, 수나의 흔적은 종로 네거리를 걷는 화자의 시선에 사방에서 포개진다. 그것은 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공기와 사람들의 얼굴과 젊은 몸들 속에 흩어져 다시 나타난다.
이때 화자가 마주하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로 겹쳐지는 감각, 곧 기시감이다. 보냈다고 믿었던 상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 화자는 수나를 다시 만난다기보다 여전히 수나 속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의 ‘부활’은 위안이나 구원이 아니라, 상실이 현재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