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묻는 시 앞에서
김현승의 <푸라타나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푸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푸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푸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푸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꿈을 묻는 시 앞에서
플라타너스는 아무래도 사춘기 소녀의 감성 시였나 보다.
학창시절 깊은 인상을 주었던 이 시를 다시 그 느낌으로 읽어보고자 애를 써 보지만, 그때의 감성과 분위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꿈을 아느냐”로 문을 여는 시는 이제, 꿈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게 된 나이 앞에서 쉽게 열리지 않는다. 사춘기 시절의 꿈이 막연하고 이유 없이 부풀어 오르던 것이었다면, 지금의 꿈은 너무도 현실적인 일들과 얽혀 있다. 먹고사는 문제, 책임져야 할 사람, 피할 수 없는 선택들. 그 사이에서 꿈은 더 이상 부르기 좋은 말이 아니라, 차라리 피하고 싶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시의 첫 질문, “꿈을 아느냐”는 말은 나를 설레게 하기보다 곤란하게 만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답할 수 없게 만든다. 사모할 줄 모르나,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사춘기 때의 사모는 미지의 대상에게도 가능했고, 그리움 자체로 충분했지만, 지금의 사모는 책임과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에 동의하기보다 자꾸 딴죽을 걸게 된다. 꿈을 묻고, 그리움의 대상을 묻고, 동행을 함께 할 정도의 관계라면 이미 ‘이웃’이라는 말로 정리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다. 같이 걸었다고 말해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이 아니다”,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물러서는 태도는 아무리 윤리의 언어로 포장해도 어딘가 미덥지 않다. 현실에서도 가까운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인지 정제된 시의 논리에는 고개가 끄덕여져도, 마음까지는 선뜻 따라가지 않는다.
이 시는 꿈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사모가 가볍게 흔들리던 나이에 가장 잘 읽히는 시였을 것이다. 플라타너스라는 이국적인 이름 역시 그 시절의 감수성과 잘 어울렸다. 지금의 나는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었을 집 근처 도서관 호숫가의 플라타너스를 보고서도, 예전처럼 시적 감수성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늘의 크기나 나무의 높이보다, 그 나무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계절을 아무 말 없이 견뎌 왔는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한때 나를 어떤 그리움의 자장으로 끌어당겼던 시였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어, 나는 이 시를 옛 추억을 떠올리듯 곁에 두게 된다. 변한 것이 없는 시를 앞에 두고, 변해 버린 나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나이를 먹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