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을 늦추는 비
이병기의 〈비〉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나리는 비
來日도 나리오소서 連日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나리는 비
저윽이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었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떠남을 늦추는 비
떠날 사람이 비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은 요즘의 감각으로는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동이 일상이 된 시대에, 날씨 하나로 이별이 미뤄진다는 것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길은 지금처럼 단단하지 않았고, 이동은 자연의 사정에 더 깊이 묶여 있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날씨가 완전히 무력해진 것은 아니다. 태풍이 오고 안개가 짙어지면 교통편은 여전히 마비된다. 비행기가 결항되고, 배가 뜨지 못하며, 도로가 끊기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날씨가 이별을 늦추는 일은 지금도 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정이나 변수로만 받아들일 뿐, 감정의 일부로까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병기의 〈비〉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시다. 이 시에서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임의 떠남을 늦추는 조건이자 화자의 마음이 기대는 시간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이별은 아직 오지 않는다. 화자는 그 사실을 알고, 반가운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눈을 감는다. 떠남을 없앨 수는 없지만, 비가 내리는 동안만큼은 미룰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난초 시인으로 알고 있던 이병기가 이런 감성적인 시를 썼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난초의 이미지에 덧씌워진 단단함과 고결함, 절제된 태도를 먼저 떠올렸던 터라, 이처럼 흔들리는 이별의 시조를 만났을 때 마음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시는 결코 떠남을 막아 세우지 않는다. 이미 임은 떠나기로 작정했고, 짐은 매여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결심 앞에서 화자는 다만 보내기 싫은 마음을 품고 서 있을 뿐이다.
그 마음은 직접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대신 비가 내린다. 어둔 새벽부터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비가 내린다. ‘시름없이’?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비가 시름없을 수는 없고 화자의 마음이 그런 상태일 것이리라. 떠나지 말라고 소리치지 않고, 잡았던 소매를 끝내 놓아주면서도 그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더디기를 바라는 마음. 화자는 자신의 정을 비라는 자연물에 실어 보낸다. 이 비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시간을 늦춰 줄 뿐이다.
그래서 “저윽이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라는 구절은 비가 내리는 날씨를 말하는 동시에 화자의 마음을 드러낸다. 날은 저물어 가지만 정은 저물지 않는다. 비가 오래 내리는 만큼 마음도 오래 머문다. 떠남은 막을 수 없지만, 떠남의 속도만큼은 늦추고 싶은 마음이 비의 지속 속에 겹쳐진다.
이 시에서 비는 난초의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진다. 시름없이 내리는 비는 난초 향처럼 은근하고 소리 없이 스며든다. 난초가 향으로 머무는 꽃이라면, 이 시의 비는 향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바뀐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그 빗속에서 화자의 정은 드러나고, 그 정은 떠남을 멈추게 하지는 못해도 쉽게 떠나게 하지 않는다.
임이 떠난 것처럼 보였다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장면은, 꿈결에 깨어 반가운 빗소리와 그대로 남아 있는 임의 짐을 확인하는 데서 온다. 그래서 화자는 다시 눈을 감는다. 현실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떠남을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눈을 감는 것이다. 비가 계속 내리는 한, 임은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 짐이 그대로 있는 한, 이별은 아직 오지 않는다. 눈을 도로 감는 선택은 시간을 조금 더 붙잡을 수 있다는 안도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떤 임이었기에 화자는 떠날 사람을 조금이라도 붙잡고자 이리 비에 마음을 실었을까. 아마도 그 임은,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끝내 보내지 못한 존재였을 것이다. 떠나야 할 이유가 분명했기에 더 매달릴 수 없었고, 그렇기에 더 조용한 방식으로 시간을 늦추고자 했을 터. 비가 내리는 동안만큼이라도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던 대상.
이 시의 임은 특정한 얼굴이라기보다, 떠남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모든 관계의 자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사람을 붙잡는 대신 비를 붙잡고, 현실을 붙드는 대신 시간을 늦춘다. 그 선택은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상실 앞에서 감정을 끝내 흩뜨리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병기의 〈비〉는 이별의 시이면서도, 이별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시다. 떠남을 막을 수는 없지만, 떠남의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다는 믿음. 비가 내리는 동안만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유예의 순간 속에서 화자는 다시 눈을 감는다. 이별은 그렇게, 비가 내리는 동안만큼 늦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