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정지용의 「故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1932년, 동방평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고향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그 이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 같다. 이 시에서처럼 고향을 떠나면 마음은 그때부터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 되기 때문인가 보다. 그건 시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기보다, 시간을 통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조건에 가깝다.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살다가 대처로 나갔고, 방학 때마다 고향집에 들렀지만 그 시골은 갈수록 낯설어졌다. 마을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나를 내동댕이치고 도망쳐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더 강했다. 그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어느새 이방인이 되어 서 있는 느낌. 스스로에 대한 낯섦과 생소해진 마을의 분위기 앞에서 나는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다시는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 감각은 정지용의 「고향」을 읽을 때마다 되살아난다. 고향과 나 사이의 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이 시는 일제 강점기, 땅을 빼앗기고 남부여대하던 역사적 비애와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고향을 잃은 서러움을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 고향에서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인식하는 시다. 심리적 고향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첫 시구부터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며 잔잔한 인식의 진술에 가까운 간극을 알아챈다. 그리던 고향과 눈앞의 고향 사이에는 시간만큼의 간극이 놓여 있고, 그 간극은 노력이나 의지로 좁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확인이다. 고향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향을 살았던 자신이 이미 다른 시간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반복되는 ‘돌아와도’라는 말은,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같을 수 없다는 조건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고향의 자연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산꿩은 알을 품고, 뻐꾸기는 제철에 울고, 꽃은 여전히 인정스레 웃고 있다. 그대로인 자연에 감응하던 화자의 감각이 ‘쓰디쓰게’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에 남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거리다. 하늘을 붙들어 안심하려는 말이 아니다. 변하지 않은 자연 앞에서, 변해버린 자신을 확인하는 문장이다. 여전히 높고 푸른 하늘은 더 이상 예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자신을 또렷이 드러내며, 고향과 화자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거리를 가시화한다.
이 시를 보면서 정지용이 지닌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놀라게 된다. 시인을 모른 채 이 시를 읽는다면 2000년대의 시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상실을 비극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리움을 감상으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자연조차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 상태, 세계와 자신 사이에 생긴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그래서 이 시는 특정 시대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을 잃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거리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 고향에서 살았던 자는 이미 시간을 건너버렸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된다. 정지용의 「고향」은 그런 어긋남을 깨달음으로 남긴 시다. 이 시는 지금도 현재형으로 읽힌다. 변하지 않은 세계 앞에서, 변해버린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은 언제나 현재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