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고향
정지용의 〈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1927년, 조선지광)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고향
정지용의 〈향수〉는 낭송이 잘되지 않는 시다. 자꾸 노래로 불리는 시다. 그것은 이동원과 박인수가 이 시를 노래로 부른 이후부터다. 그 이후로 〈향수〉는 읽는 시라기보다 귀에 들리는 시가 되었고, 우리는 이 시를 눈으로 따라가기보다 멜로디에 실어 기억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노래의 음의 높이가 너무 높다는 데 있다. 길게 늘어지는 고음, 감정을 과도하게 끌어올리는 창법을 듣고 있으면 편안하지가 않다. 고향을 떠올리는 노래라기보다, 고향을 과시하는 목소리를 듣는 느낌에 가깝다. 그 순간 시는 더 이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귀에서만 맴돈다.
정지용의 언어는 본래 그렇게 울부짖는 쪽이 아니다. 그의 고향은 격정으로 부르는 대상이 아니라, 조용히 떠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 장소에 가깝다.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풍경 등은 과도하게 끌어올린 고음보다는 낮고 고른 호흡에 어울린다. 그런데 노래가 그 호흡을 대신하면서, 시의 결은 점점 무뎌진다.
그래서 〈향수〉를 노래로 먼저 접한 독자에게 이 시는 읽기가 어렵다. 이미 귀에 박힌 멜로디가 문장 사이로 끼어들기 때문이다. 눈으로 읽어야 할 시가 자꾸 귀로 흘러가 버릴 때, 우리는 시가 품고 있던 되돌릴 수 없음의 감각을 놓치게 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고향을 부르는 목소리만 남는다.
어쩌면 〈향수〉는 소리 내어 읽기보다, 속으로 더듬듯 읽어야 하는 시인지도 모른다. 노래가 아닌 침묵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래야 비로소 이 시가 말하려던 고향,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고향이 드러난다.
이 시는 그의 시 〈고향〉과도 유사한 듯 보이지만, 실은 결이 다르다. 〈고향〉이 심리적 고향 상실의 인식을 전면에 내세운 시라면, 〈향수〉는 그 상실을 말하기에 앞서 고향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향수〉에는 고향의 자연만이 아니라, 그 자연 속에 살았던 가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엷은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모습에서는 하루의 노동을 마친 고단함과 저녁 무렵의 고요가 함께 느껴지고,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는 어린 누이에게서는 고향의 생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는 모습에 이르러, 고향은 비로소 한 가족의 생활 현장이 된다.
〈향수〉에서는 자연 역시 엄연한 주체로 전면에 나선다. 넓은 벌의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밤바람 소리, 풀섶의 이슬, 하늘의 성근 별, 서리 까마귀까지, 자연은 사람들의 삶을 둘러싼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숨 쉬는 존재로 등장한다. 실개천은 ‘옛이야기 지줄대’며 ‘회돌아 나가고’, 황소는 ‘해설피 금빞 게으른 울음을’ 울고, 빈 밭에 밤바람 소리는 말을 달리고, 서리 까마귀는 초라한 지붕 위를 우지짖고 간다. 이 자연들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제 리듬과 감각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래서 〈향수〉의 고향은 인간 중심의 회상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 있던 세계로 그려진다. 사람과 자연, 둘이 공존하며 각자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내던 자리, 누구 하나 주인이 되지 않고 서로의 삶을 지탱하던 세계다. 그곳에서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였고, 기억이 아니라 함께 건너온 시간이다.
이 고향의 가족과 자연의 모습은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도, 감상의 대상도 아니고, 인간 역시 자연을 벗어난 주체로 서 있지 않다. 둘은 같은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며, 계절과 노동의 리듬 속에서 나란히 존재한다.
그래서 이 시의 고향은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한 시대의 삶의 방식에 가깝다. 자연과 인간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세계, 생활과 풍경이 따로 구분되지 않았던 시간의 단면이 이 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곳은 이 시의 마지막처럼 전자파의 소음이 없었던 시대, 서리 까마귀가 우지짖고 간 초라한 지붕을 이고 있는 방안에서 가족들이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유년을 보냈던 나에게, 그 장면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결혼하고 나서 나는 이 시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대목에 자꾸 눈이 갔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문장이었다. 아내가 고향 풍경 속에 섞인 한 사람쯤으로만 읽혔다. 그러나 결혼 후, 이 문장은 더 이상 풍경의 일부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드는 시구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이라는 말은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남편의 눈에 아내가 그렇게 보였으니, 아내의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곱씹어 보면 이 표현에는 평가도 판단도 없다. 사랑을 과시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살아온 시간의 결과처럼 놓여 있다. 사철 발을 벗고 산다는 것은 가난이나 고생을 강조하려는 장치도 아니다. 계절을 건너며 몸으로 생활을 감당해온 존재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 대목은 남편에게 아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게 만든다.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일상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사람. 특별해서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해진 사람. 그래서 이 아내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라지면 세계가 무너질 것 같은 존재다.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고 있는 아내의 모습, 그 침묵과 무심함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고향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 있던 세계라면, 이 아내는 그 세계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떠받치고 있는 존재다. 함께 사는 시간이 무엇을 지워가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몸으로 알게 된 뒤에야, ‘아무렇지도 않음’이 얼마나 깊은 관계의 다른 이름인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