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고리오 영감』은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는 선언으로 끝난다. 젊은 법학도 라스티냐크의 이 말은 패배의 탄식도, 도덕을 버리겠다는 타락의 선언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세계의 규칙을 마침내 이해했다는 인식의 언어다. 그는 파리가 정의나 선의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보았고,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쉽게 이용당하는지도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시골로 돌아가지도 않고, 안전한 법학도의 길로 후퇴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이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라스티냐크의 선언은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아니라, 시대를 읽을 줄 아는 감각에서 나온 선택이다. 고리오 영감의 전근대적 사랑이 파멸로 귀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사교계의 허영과 위선이 어떻게 인간을 소모하는지를 목격한 그는 더 이상 순진한 도덕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보트랭처럼 법과 윤리를 노골적으로 넘어서는 길을 택하는 것도 아니다. 라스티냐크는 이 사회의 규칙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한 뒤, 그 규칙 안으로 들어가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시골 가족에게로 되돌아가지 않고, 안전한 법학도의 길로 후퇴하지 않으며, 거액의 유산이 약속된 선택마저 외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개인의 안락을 보장할 수는 있었지만, 변화의 중심에 서게 해 주지는 못하는 길이었다.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떠나는 대신 파리 속으로 들어간다. 자본과 권력, 사교와 정치가 교차하는 델핀 드 뉘싱겐의 식탁을 선택한 것은 타락이 아니라 참여의 선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는 말은 도덕을 버리겠다는 항복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냉혹한 질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각성의 언어로 읽힌다. 고리오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인간성은 이제 감정의 순결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지성의 형태로 전환된다. 발자크는 이 장면에서 한 청년의 타락을 그리는 대신, 근대적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이라는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된다. 이름은 ‘고급하숙’이지만, 실상은 파리 사회의 가장 적나라한 단면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층마다 방값에 따라 방의 상태와 하숙생의 대우가 달라진다. 이곳에서 인간은 인격으로 존재하기보다 지불 능력으로 분류된다. 발자크는 이 작은 하숙집 안에 파리 사회 전체를 압축해 놓는다.
특히 하숙집 여주인 보케르 부인은 자본주의 논리를 일상의 윤리로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존재다. 그는 하숙생을 인간적 호불호나 연민이 아니라 지불 능력에 따라 정확히 대우한다. 돈을 낼 때는 음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돈이 떨어지면 곧바로 냉대가 시작된다. 이 태도는 잔인해 보이지만 위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낸 만큼 대우받는다”는 시장의 원리를 가장 솔직하게 실천한다.
그와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 고리오 영감이다. 그는 전근대적 부성의 전형이다. 딸들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한다. 재산뿐 아니라 존엄과 노후, 끝내는 목숨까지 내어준다. 중요한 점은, 그가 딸들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돈으로만 대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고리오가 딸들을 귀족과 은행가 집안에 결혼시킨 데에는 분명 보상 심리가 작동했다. 제면업자로 벼락부자가 되었지만 끝내 넘지 못한 신분의 벽을 딸들이 대신 넘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 신분 상승은 딸들의 자리를 높이는 동시에 아버지를 사회에서 지워버렸다. 사랑은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아버지를 사회적·물리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숙집 사람은 아니지만 라스티냐크의 어머니는 고리오와 닮은 듯 보이지만 다르다. 그녀 역시 아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지만, 맹목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 희생을 분명히 말하고, 그 대가로 성공을 요구한다. 고리오의 사랑이 자기 소멸이라면, 라스티냐크 어머니의 사랑은 부담과 압력이다. 이 양면성은 오늘날의 부모상과도 닮아 있다.
하숙집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보트랭이다. 탈옥수이자 범죄자인 그는 법의 바깥에 있지만, 상류층의 위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사회의 진실을 말한다. 그는 불법의 세계에 속해 있으나, 오히려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와 거래를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출세를 위해서는 도덕도 법도 무력해질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불쾌하지만 공허하지 않다. 그는 유혹자이면서 동시에 해설자다. 법의 바깥에 있는 그의 목소리가 법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있다.
그 와중에 가장 됨됨이가 바른 인물은 비앙숑이다. 의대 지망생인 그는 화려하지 않지만 끝까지 고리오의 곁을 지킨다.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발판으로 삼는 인물이 아니며, 직업 윤리와 인간 윤리가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친구 라스티냐크에게 자신은 시골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고지식하고 보잘것없는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삶에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도 저녁을 두 번 먹지는 않았고, 인간의 행복이란 발바닥에서부터 후두부까지, 곧 몸 하나를 온전히 지탱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라며, 돈의 많고 적음과 행복은 본질적으로 무관하다고 여긴다.
이런 그의 태도는 세속적 성공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마지막 인간적 가능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발자크는 비앙숑을 미래의 중심 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의 윤리는 존중받지만, 시대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비앙숑은 사라지지 않지만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옳은 인물이지만, 도래할 세계의 주인공은 아니다. 발자크가 보여주는 것은 선함의 패배가 아니라, 선함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하는 시대의 도래다.
그래서 비앙숑의 말은 위안으로 남고, 라스티냐크의 선언은 현실로 이어진다. 두 인물의 대비 속에서 『고리오 영감』은 묻는다. 인간이 바르게 사는 것과, 시대 속에서 살아남는 것 사이의 거리는 과연 얼마나 먼가.
고리오의 두 딸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와 델핀 드 뉘싱겐은 아버지의 임종은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 부부 싸움과 체면이 더 급하다. 남편이 아내의 정부(情夫)를 사실상 용인하고, 아버지가 딸이 사랑하는 정부를 지키기 위해 돈을 쓰고 조언까지 하는 풍경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이러한 관계는 예외적인 일탈이라기보다, 공공연히 묵인된 관행에 가까웠다.
당시 결혼은 사랑의 제도라기보다 재산과 가문, 사회적 안정을 위한 계약이었고, 감정과 욕망은 그 바깥에서 관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아내의 사교적 성공과 체면 유지를 위해 눈을 감았고, 아버지는 딸이 사교계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금전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정부는 스캔들이 아니라 사교적 자산이었고, 아버지의 역할은 도덕적 훈계자가 아니라 현실적 후견인이었다.
그래서 딸들의 냉혹함은 개인적 비정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사회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 결과다. 이 사회에서 천하고 돈 없는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숨겨야 할 과거이며, 사교계에서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고리오의 비극은 딸들이 특별히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가 더 이상 그 세계의 논리에 필요 없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발자크는 이 장면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한 시대의 감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고리오 영감』에서 문제는 사랑의 진위가 아니라, 사랑이 더 이상 보호 장치가 되지 못하는 사회 그 자체다. 고리오는 딸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근대 사회의 계산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그가 버려진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시대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스티냐크, 우리의 으젠이 있다. 그는 부모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으며 자신 역시 고혈을 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아나스타지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고리오의 곁을 끝까지 지킨다. 딸들이 외면한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는다. 그는 황혼녘 묘지에서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파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발자크는 이 선언을 허세로 남기지 않는다. 『인간희극』 에서 라스티냐크는 실제로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해 장관이 된다. 그는 파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은 한 아버지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근대 인간의 탄생기다. 전근대적 부성은 죽고, 이해와 계산과 선택의 시대의 도래에서 라스티냐크는 그 문턱을 넘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세상을 미워하기보다, 먼저 그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구조를 외면하지 않은 채,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