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35

쉽게 쓴 시라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시

by 인상파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1948,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쉽게 쓴 시라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시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엄격한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부담이 작용해서일 것이다. 그건 그의 시가 나라는 사람을 조금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스로에게 그토록 철저했던 태도 앞에서, 나는 언제나 느슨한 자리로 물러나 있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씌어진 시’, 그의 입장에서는 안일함이 깃든 말이었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스스로를 너무 쉽게 용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자문이 함께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쉽게 씌어진 詩〉 앞에서, 그 물음을 시인에게만 남겨둔 채 비교적 편안한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는 남의 나라 땅, 그것도 식민지 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시나 쓰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 깊게 배어 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어떤 이는 체포와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의 현장에 서 있는데, 자신은 책상 앞에 앉아 시어를 다듬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윤동주에게 시인의 자의식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시는 고백인 동시에 자기 검열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는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 사이에서, 써도 되는 시와 써서는 안 되는 시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불편함을 끝내 시 속에 남겨둔다.


그가 선택한 태도는 침전이다. 침전은 도망이 아니라 가라앉음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바로 그 어려움 앞에서 그는 쉽게 말하지 않기 위해, 가볍게 쓰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라앉힌다. 침전은 목적 없는 정지가 아니라, 저 깊은 내면의 자기를 만나기 위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먼저 등불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둠을 조금 내몰고, 그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 이 아침은 희망의 아침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시간에 가깝다.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래하는 시간, 각오 없이도 맞닥뜨려야 하는 아침이다. 윤동주는 그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을 ‘최후의 나’라고 부른다. 이 말에는 분명 비장미가 있다. ‘최후’니 ‘최초’니 하는 말들이 시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이 시어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그 ‘최후의 나’는 영웅적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수 없는 자리, 끝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한 자리에 선 사람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가 이루어진다. 최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진 최초의 만남이다. 결의의 악수도, 승리의 악수도 아닌, 어쩌면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도 된다는 최소한의 허락에 가까운 악수이리라.


이 시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다. 이 시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릴수록, 이 봉투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단순한 개인 감정으로만 읽게 두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부담은 시를 쓰는 자신이 아니라, 그 시를 가능하게 한 조건 전체를 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을 잘 키워 덕을 보려 했던 그 시대의 풍조를 떠올릴수록, 이 봉투는 순수한 사랑과 헌신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기대와 부담, 사랑과 계산이 함께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대목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이렇게 이 시는 여러 면에서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윤동주의 강렬한 시어의 무게가 그대로 독자에게로 옮겨온 탓이리라. 그러나 그 부담감은 이 시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윤동주는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안일함을, 독자에게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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