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따라 달린다 — 기분 좋은 말의 감각에 대하여
황인숙의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 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 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 보자.
느낌표들을 밟아 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 보자. 맞아 보자. 터뜨려 보자!
말을 따라 달린다 — 기분 좋은 말의 감각에 대하여
기분 좋은 말은 색깔에서 시작된다.
파랑과 하양.
푸른 하늘과 바다가 생각난다. 그리고 설원.
깨끗하고 싱그러운 것.
사과나무의 빨간 사과, 또는 아오리라고 부르는 연두 사과.
신선하다. 생선의 번뜩이는 비늘이 햇빛을 받아 잠깐 눈을 찌르는 순간.
짜릿하다. 포커의 히든을 쪼는 그 짧은 숨.
말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미 눈앞에 빛을 세운다.
색은 감각이 되고
감각은 기분이 된다.
후련하다.
어둠 속에서 어둔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
내 안에서 피시식
연소되어 나오는 우울.
타들어 가는 것은 담배가 아니라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말들이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검게 그을렸던 생각들.
연기는 잠깐 허공에 머물다 사라지고
그 사라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후련하다는 말은
깨끗하게 비워낸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 태워 보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말은 소리로 터져 나올 때
생각할 때와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시원하다. 한여름 대낮의 소나기.
달콤하다. 귓가에서 맴도는 사랑의 속삭임.
아늑하다.
아늑, 이라는 말은 왜 이리
먼 데서 들려오는 것일까.
아련이 아늑일까.
가깝다고 하기엔 늘 한 박자 늦고
손에 닿는 순간에는
이미 지나가 버린 말.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크림처럼 부드러워
부드러운 건 말랑말랑
기분이 좋다.
얼음.
등골이 성에가 낀 것처럼 서걱일 때
주문한 커피는
노 아이스.
바람.
모든 바람은 살랑거리며
살랑살랑 왔다.
바람을 지나치지 못해
바람처럼 지나가고자
바람을 마신다.
아아아,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아아아,
누가 오래 하는지 내기를 해볼까.
아아아,
소리를 질러볼까.
아아아, 뜻이 없어서 좋다.
아아아, 모든 말이 된다.
숨이 길어지니
숨이 멎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엄마는 사랑하는—
사랑하는 무엇이 되려고
이렇게 말을 붙잡고 있는 걸까.
사랑이라는 말은
입속에서 오래 잠든다.
쉽게 삼켜지지 않고
쉽게 뱉어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불러 본다.
부르면
사랑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질까.
소중한,
소중한 어머니.
당신이 지금은 소중한—
그 말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는 이유를
나는 안다.
소중하다는 말은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어서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 말하지 않고
잠깐 멈춘다.
소중한, 이라고만 불러도
이미 충분한 순간이 있다.
달린다.
기분 좋은 말들이 소리가 될 때
그것은 달린다.
나는 예전에도 달렸고
지금도 달리고
내일도 달릴 것이다.
비!
비는 내리는 걸까.
퍼붓는 걸까.
쏟아지는 걸까.
적시는 걸까.
긋는 걸까.
묻히는 걸까.
비라는 한 글자가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린다.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밟아 보고
만져 보고
핥아 보고
깨물어 보고
맞아 보고
떠뜨려 볼래!
비는 문장이 아니라
사건이니까.
말도 그렇다.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일.
그래서 나는
기분 좋은 말을 고르지 않는다.
달리는 말을 따라갈 뿐이다.
넘어지면 젖고
젖으면 웃고
웃다 보면
말은 다시
생각이 되고
소리가 되고
느낌표가 된다.
아아아—
멈추지 못해도 괜찮다.
달리는 동안은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