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38

십자가―윤동주 시성(詩性)이 머뭇거린 자리

by 인상파

윤동주의 〈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십자가―윤동주 시성(詩性)이 머뭇거린 자리


이 시는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널리 읽히는 다른 시들에 비해, 기독교적 상징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십자가, 교회당,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명시적 시어는 시를 곧바로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그만큼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독자는 상징을 해석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의미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윤동주 시 특유의 서성임과 자기 성찰, 윤리적 회의는 충분히 머뭇거리며 축적되기 전에 정리된다.


자기희생과 결백, 내면을 향한 성찰이라는 윤동주의 핵심 윤리는 이 시에서도 분명히 유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화자의 내부에서 끝까지 흔들리며 형성되기보다는, 이미 의미가 굳어진 종교적 서사에 기대어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제시된다. 이로 인해 시는 윤동주의 세계관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시적 밀도와 긴장 면에서는 다소 평면적인 인상을 남긴다.


제목의 ‘십자가’부터가 그렇다. 십자가는 이 시에서 끝까지 해석을 유보해야 할 상징이라기보다, 처음부터 고정된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화자가 마주한 윤리적 난관은 질문으로 확장되기보다, 이미 주어진 의미를 향해 수렴되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시 속에서 보이는 서성임과 머뭇거림 역시 그 자체로 긴장을 생성하기보다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를 확인하는 제스처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세계에서 화자의 고통은 ‘괴로웠던 사나이’라는 시어 속에서 예수의 고통과 나란히 놓이지만, 두 고통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남는다. 예수의 희생이 허락된 의미의 자리라면, 화자의 고통은 여전히 이름 붙여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목아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는 태도뿐이다. 이 조용함은 윤동주 시의 윤리적 절제이자, 동시에 시적 긴장이 더 이상 밀고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이다.


특히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이 시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말은 화자의 고통을 예수의 고통에 비추어 의미화하려는 시도이지만, 동시에 윤동주 시가 지녀 온 불안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단번에 건너뛰게 만든다. 예수는 이미 고통의 의미를 획득한 존재이며, 그 앞에서 화자는 스스로의 고통을 끝까지 의심하고 질문하기보다는, 그 의미에 기대어 자신의 고통을 내면화한다. 그 결과 고통은 더 이상 흔들리며 형성되는 윤리적 질문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태도의 문제로 정리된다. 이 지점에서 윤동주 시의 중요한 특징인 불안과 회의의 지속을 멈추고, 절제된 자기희생의 윤리로 수렴된다.


이러한 수렴은 시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윤동주의 시가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유보된 질문 속에서 화자가 스스로를 흔드는 자리라면, 〈십자가〉는 그 질문을 앞서 정리해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십자가〉는 윤동주의 윤리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지만, 시적 성취의 측면에서는 그의 다른 시들만큼의 긴장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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