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48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

by 인상파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먹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이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듯하리라.


고향 가차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잰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고향은 물음이 된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고향은 일상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등을 돌린 사람에게 고향은 질문이 된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무엇이 되어 돌아왔는가. 나는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대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사람을 멈춰 세운다.


정지용의 〈고향〉에서 그는 말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여기에서 고향은 기억 속 고향과 현실의 고향 두 개가 존재한다. 고향에 돌아가 보니 마음이 품고 있던 풍경은 거기에 없다. 그 순간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과 현재 사이에 벌어진 어긋남이 된다. 고향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거리’가 된다.


윤동주의 〈또 다른 故鄕〉에서는 고향이 더 낯선 얼굴로 나타난다.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고향은 풍경이 아니라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곳에서 그는 타향의 고단함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마주한다. 고향은 환영의 공간이 아니라 자기검열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고향을 찾는다. 고향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름이 된다.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에 이르면, 고향은 발조차 들여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자는 나룻가에 서성인다. 흙이 풀리는 냄새, 산기슭 조상의 무덤,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이 뜨는 내음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고향은 흐릿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선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강을 건너지 않는다. 그에게 고향은 도착지가 아니라 경계가 된다. 들어갈 수 있으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리. 눈앞에 있으나 발이 멈추는 자리.


이 세 편의 시를 나란히 두면, 고향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돌아가 보면 이미 달라져 있고, 돌아오면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하며, 눈앞에 있어도 쉽게 건너지 못하게 하는 이름. 고향은 시간이 만들어 낸 간극이다.


흔히 고향을 어머니에 빗대어 말한다. 언제라도 돌아가면 아무 말 없이 안아 주는 곳처럼. 그러나 시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향은 그렇게 단순한 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향은 무조건적인 포용의 공간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윤리가 작동하는 장소다. 오래 머문 사람들의 시간과 리듬이 축적된 곳, 서로의 이력을 알고 기억하는 곳. 그래서 더 쉽게 품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쉽게 내치기도 하는 자리다.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서성이며 들어가지 못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오장환의 화자는 단순히 망설이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고향을 모르는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멈춘다. 그 망설임은 공동체와 자신 사이의 윤리적 긴장을 감지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고향의 일부인가, 아니면 방문자인가. 그 질문이 강보다 깊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기억의 보존이다. 현실의 고향은 변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기억 속 고향은 온전하다. 강을 건너는 순간, 기억과 현실은 충돌한다. 달라진 고향을 확인하는 일은 곧 상실이다. 그래서 ‘앞’이라는 자리는 유예가 된다. 들어가지 않으면 고향은 여전히 기억 속의 형상으로 남는다. 건너지 않음은 비겁함이 아니라 상실을 늦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시를 붙잡는 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이다. 시는 비탄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나룻가에 서성이다”라는 시구로 상태를 보여준다. 체념도 결단도 아닌, 다만 고향과 자신 사이에 생긴 틈 앞에서 멈춰 선 존재의 모습. 고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워서 더 멀어진 자리다.


내게 고향은 무엇일까. 이미 고향을 떠나 생의 사분의 삼을 넘게 타지에서 살아온 나에게 고향은 쓸쓸한 저녁빛 같다. 낮과 밤 사이,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시간. 오장환의 화자처럼 나 역시 늘 고향 앞에서 서성인다. 시간이나 교통편의 문제는 아니다. 시간의 단절일 수도 있고, 자격에 대한 망설임일 수도 있으며, 기억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이 겹쳐 있는 고독일지도 모른다.


고향이란 확실한 답이 아니라 사람을 멈추게 하는 물음이 아닐까. 돌아가는 곳이기보다 나를 가장 낯설게 만드는 자리. 등진 자에게만 고향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린 순간부터 비로소 질문이 시작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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