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그대여, 훗날 물로 만나자
나는 이 시를 오랫동안 오독해 왔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가문 좋은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인 줄 알았다. 가문을 가물다가 아니라 家門으로 지레짐작했다. 시인은 이런 오독을 예상했을까. 이 ‘가문’이라는 시어를 ‘旱’이 아니라 ‘家門’으로 읽으면 의미는 현저하게 달라진다.
家門으로 읽으면 물은 더 이상 자연의 순환 속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가문 좋은 집의 취향과 무관한 선택, 혹은 그 질서에 기대지 않는 만남이 된다. 승인과 체면을 넘어선 결합처럼 보이고, 물은 계급적 질서를 비껴 가는 존재가 된다. 불은 그 질서와 부딪히는 에너지로 읽히고, 시는 갑자기 사회적 긴장을 띤다.
그러나 ‘가문(旱)’으로 읽으면 물은 메마른 집에서 환영받는 존재일 뿐이다. 마른 땅에 비가 반가운 것처럼, 물은 가문 어느 집에서든 반길 대상이 된다. 의미는 빠르게 정리된다. 그래서 싱겁다. 물은 좋고, 불은 소모적이며, 결국은 물로 가자는 구조가 비교적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시의 힘은 극적인 갈등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을 묻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불과 물은 대립이라기보다 서로 스며들며 이어지는 상태들이다. 불 속에도 물의 가능성이 있고, 물 속에도 불의 잔열이 있다. 영원성이나 순결, 해방 같은 단어로 단단히 묶어두려 했던 욕망을 내려놓고 물과 불을 비유로 다시 보면, 이 시는 사랑의 절대적 완성을 말하기보다 만남의 밀도를 말하는 시에 가깝다. 타오르다가 식어가고, 흘러가며 스며드는 과정.
“지금은 불로 만나려 한다”는 문장은 선택이라기보다 조건의 인정처럼 읽힌다. ‘지금’이라는 말에는 시대와 환경이 배어 있다. 우리가 원해서 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물은 도덕적으로 더 높은 단계가 아니라 조건이 완화된 이후의 다른 밀도다. 불은 응축이고, 물은 확산이다. 불은 긴장 속의 결합이고, 물은 긴장이 낮아진 공존이다.
물이 되어 만나고 싶지만 그것은 아직 가정이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말은 직설이 아니라 가정으로 시작한다. 물은 소망의 자리이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반면 불은 현재형이다. 지금은 불이고, 이후는 물이다. 그 이동은 감정의 성숙이라기보다 조건의 변화에 가깝다. 물로 만나는 일은 선택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능한 상태.
그래서 이 시는 무엇이 옳은가를 말하기보다,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만나고 있는가를 묻는다. 오독은 잠시 의미를 날카롭게 만들었지만, 원뜻은 시를 차분한 자리로 돌려놓는다. 시는 이상을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과 이후를 나란히 놓는다.
우리는 지금 불로 만나고 있을지 모른다. 서로를 태우는 밀도 속에서, 혹은 그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그리고 언젠가, 그 불이 지나간 뒤에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것이 약속인지 희망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시는 사랑의 영원을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통과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지금은 불이고, 이후는 물이다. 그 사이를 건너는 동안, 우리는 어떤 밀도로 서로를 만나고 있는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