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57

이육사의 〈황혼〉

by 인상파

이육사의 〈황혼〉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1933년, 신조선)



광야 이전의 골방에서


문학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어떤 작품은 쉽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낑낑대며 여러 날, 여러 번 그 문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다시 와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이 열리기도 하고, 끝내 열리지 않은 채 남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다르다. 내 마음이 가까이 가기만 해도 문이 쓰윽 열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준다.


이육사의 시는 내게 그런 시는 아니었다. 그의 시는 늘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대륙적이고 남성적인 강한 이미지가 먼저 다가왔다. 젊었을 때 나약하게 흔들리던 시절에 그의 시는 나를 붙잡아 주는 시이기도 했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지향하는 그의 큰 뜻은 아름다웠고,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의감을 심어주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잘 이해되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 웅장한 분위기에 취해 나는 그의 시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자잘한 사적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담대한 정신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황혼〉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저항시들보다 이 시가 내게 더 착착 입에 감겼다. 아마도 이 시가 거대한 역사나 민족의 운명에서 출발하는 대신, 한 사람의 골방에서 시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이육사의 시에서 ‘골방’이라는 말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그의 시에서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것은 ‘광야’나 ‘북방의 고원’ 같은 넓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는 골방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골방에서 황혼을 맞아들이고,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넓은 바다 위를 떠도는 갈매기처럼 인간은 외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의 출발점은 결국 그 골방에 앉아 있는 화자의 마음일 것이다. 인간의 외로움을 말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의 외로움을 먼저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자리에서 머물지 않는다. 골방에서 시작된 시선은 별자리의 별들, 삼림 속 수녀들, 시멘트 장판 위의 죄수들,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행상대와 아프리카의 사람들까지 점점 멀리 뻗어나간다. 한 사람의 방에서 시작된 외로움이 지구 곳곳의 존재들에게로 번져 간다.


그래서 화자는 황혼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우리는 흔히 가슴으로 안아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화자는 가슴이 아니라 ‘입술’을 내민다. 그것도 ‘타는 입술’이다. 골방에 앉아 있지만 세계의 외로움을 향해 직접 닿고 싶은 마음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외로움에서 출발해 다른 존재들의 외로움으로까지 마음을 넓히려는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암암히 사라진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황혼은 매일 오지만, 오늘의 황혼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이 골방에 모인 세계, 지금 이 입술의 온기, 지금 이 연약한 마음은 한 번 식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 시는 거대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껴안으려 했던 뜨거운 순간도 결국 황혼처럼 스러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다만 잠시 타올랐다가 식어 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이 시는 ‘광야’ 이전의 인간적인 이육사를 보여준다. 저항 이전의 이육사, 외침 이전의 이육사. 골방에서 황혼의 손을 붙잡고 세계의 외로움을 견디는 한 사람의 이육사. 그리고 그 순간은 황혼처럼 조용히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바로 그 골방의 황혼 속에서 이미 광야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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