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年譜>
이육사의 <年譜>
‘너는 돌다리ㅅ목에서 줘왔다’든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江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바지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港口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부쳐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길 우에
肝ㅅ잎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해도
쇠사슬을 잡어맨 듯 무거워졌다
눈우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고
때로는 설래이며 바람도 불지(시학, 1939)
버려진 마음의 연보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왔다’는 말을 나도 가끔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이에게 장난처럼 건네는 말이지만 듣는 아이의 마음에는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은 농담이면서도 어딘가 버려진 존재 같은 느낌을 슬쩍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시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찾아보며 이 시가 이육사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우리는 흔히 이육사를 ‘절정’과 ‘광야’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북방의 고원, 매운 계절, 강철 같은 의지. 그런 단단하고 대륙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정서를 담은 시를 만나면 잠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편견인지도 모른다. 한 번 사람들에게 고정된 시각은 좀체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기억이란 이상하게도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수정되지 않는다. 이육사가 굵직한 시만 썼을 리 없는데도 우리는 그를 늘 같은 얼굴로만 떠올린다. 시인에게도 여러 결이 있을 텐데 독자는 어느 한 장면만 붙잡고 그를 기억해 버린다.
이 시는 육사의 불행한 자전적 이야기일까. 아니면 유년의 기억을 빌려 삶의 운명을 돌아보는 시일까. 이육사의 생애를 보면 그가 버려진 아이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에서 말하는 ‘버려진 아이’는 실제의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화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감정일 것이다. 할머니의 핀잔 같은 한마디가 마음에 남아 스스로를 그렇게 여겨 보았을 수도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마음이 그런 비유를 불러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의 출발점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마음의 기록에 가깝다. “버려진 문바지였는지 몰라”라는 말에는 어디에도 단단히 붙들리지 못한 삶의 감각이 담겨 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어딘가에 잠시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감정은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세상 한가운데 놓여 살아가게 된 존재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누구나 세상에 버려진 아이라는 의식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실제의 버려짐이 아니라 존재가 문득 느끼는 근원적인 고독에 가깝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밀려 나오는 순간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던져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너는 돌다릿목에서 주워왔다’는 할머니의 핀잔, 농담처럼 던진 어른의 말이 아이에게 묘한 마음의 그늘을 남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 속의 화자는 그 말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참이라고 하자”고 한다. 장난으로 넘길 수도 있는 말을 차라리 사실처럼 받아들여 버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강 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바지”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버려진 아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디에도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의 관계도, 고향도, 사랑도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열여덟의 새봄도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에 술을 마시며 지나가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붙잡기보다 흘려보내는 쪽이 더 익숙해지는 삶이다.
열여덟의 새봄, 항구의 밤, 첫사랑, 그리고 술. 그 장면들은 실제 사건일 수도 있고 청춘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육사의 생애를 떠올려 보면 그것이 완전히 허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활동, 독립운동 조직 활동, 투옥, 고향과 멀어진 삶을 살며 실제로 지나왔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시에서 그것들은 한 사람의 청춘을 압축해 보여주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삶의 장면들이 하나씩 지나가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거워진 발걸음과 눈 위에 남을 발자국뿐이다.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은 언젠가 바람에 지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그 위를 걸어간다. 그것이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