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喬木>
이육사의 <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1940년, 인문평론)
꽃 피지 말라고 말하는 마음
처음 이 시를 읽을 때 ‘교목’을 고목처럼 떠올렸다. 세월과 온갖 풍상을 겪은 나무이니 속부터 병이 들어 말라비틀어질 법도 하지 않은가. 고목이라면 거의 죽은 나무나 다름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말라는 말이 그 나무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겪었으니 더 이상 꽃을 피우며 흔들리지 말라는 뜻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읽어 보니 그 말은 교목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봄이라는 계절을 향해 던지는 말처럼 보인다.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이 말은 나무에게 하는 충고라기보다 봄에게 건네는 말이다. 봄이 온다면 당연히 꽃이 피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아예 꽃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 속에는 봄을 거부하는 마음이라기보다 오히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깊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봄을 간절히 바라지만 그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 애가 탄다. 그래서 차라리 꽃을 피우지 말라고 말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그 혹독한 계절 속에서도 교목은 여전히 낡은 거미집을 휘두르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세월의 흔적이 몸에 달라붙어 있지만 그것을 털어내듯 휘두르며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봄을 기다리며 끝없는 꿈길에 그는 혼자 설레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설레임은 단순한 헛된 마음이 아닐 것이다. 시인은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고 말한다. 설레는 마음이 잘못이라면 후회가 따라야 할 텐데, 그는 오히려 뉘우침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어쩌면 그것은 버릴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봄을 기다리는 일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스스로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처럼 들린다.
그런 각오로 서 있으니 교목에게도 쓸쓸함이 없을 리 없다.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이라는 구절은 바로 그 마음의 그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흔들림이나 후회의 뜻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는 말의 바탕이 되는 정서처럼 보인다. 쓸쓸함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쓸쓸함을 알고도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목은 끝내 흔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바람조차 흔들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까지, 그 나무는 이미 수많은 세월을 지나왔고 기다림을 견뎌 왔다. 꽃을 피우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봄을 기다리고, 쓸쓸함을 알고도 그 마음을 후회하지 않는 것. 어쩌면 이 시의 교목은 바로 그런 마음의 형상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육사의 시에는 기다림의 정서가 자주 나타난다. 〈청포도〉도 그렇고 〈광야〉도 그렇다. 그리고 이 시에서도 그렇다.
그는 끝내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인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