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복된 날
아무 일 없는 복된 날
좋은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데
내가 그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밀려왔다.
이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들 녀석이 집을 떠나게 되고 군대를 가고,
또 가정을 꾸리게 되면
지금처럼 함께 사는 시간도 자연스레 끝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제 하나둘 떠날 시기가 되었구나 싶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미 조금 늦은 감도 있다.
아들 또래 아이들은 이미 군대를 다녀왔거나
학교와 집이 멀어 자취를 하며 부모 품을 떠나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들도 한때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일 년 남짓 혼자 살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함께 지내고 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특별한 사건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마주치는 평범한 날들일 뿐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함께하는 지금이
어쩌면 가장 좋은 시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데 나는 이 시간을 눈치 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의 일상에 묻혀
그 소중함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나의 무심함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어젯밤 갑자기 잠결에 눈이 떠졌다.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복된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을 쫓았다.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주어지고,
아직 내 몸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고,
내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갈 수 있고,
어머니가 옆에 계신다.
대단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큰 기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의 일상이 이어지고,
저녁이 되면 같은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내일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드는 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삶은 큰 풍파가 없어도
아무 기척 없이 조금씩 달라져 간다.
우리는 그 변화를 그때는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며 깨닫는다.
그때가 좋았다고.
그 시절이 가장 평온하고 따뜻한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 역시 이미 지나버린 몇 장의 호시절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늘 지나간 뒤에야 알아차린다.
그때가 좋았다고.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런 시간일지도 모른다.
훗날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하게 될 날들.
아무 일 없던 평범한 저녁들.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시간들.
문득 웃고, 문득 짜증 내고,
그러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던 날들.
좋은 시절은 대개 그렇게 지나간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습으로.
그래서 오늘은 이 하루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시간을
조금 더 또렷하게 기억해 두고 싶다.
훗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지금 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게 될 그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내 곁을 지나가고 있으니까.
아무 일 없는 이 하루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복된 시절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