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눈 내리는 밤, 소주 한 잔의 상상
이 시는 어쩌면 술 한 잔으로 쓸쓸한 인생을 견디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폭설과 사랑하는 여인. 겉으로 보면 낭만적인 풍경이다. 가난한 화자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눈이 푹푹 내린다고 말한다. 마치 그의 사랑에 눈이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눈이 꼭 상서로운 기조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눈은 ‘푹푹’ 내리고 있다. 그 눈은 낭만적인 풍경이면서도 두 사람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폭설 때문에 화자는 나타샤를 만나러 갈 수 없는 것일까. 눈은 쏟아붓고, 그는 그 밤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사랑하는 나타샤를 떠올린다. 눈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둘 사이에 오간 약속이 아니다. 혼자 술을 마시며 마음속에서 불러낸 상상이다.
그는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강한 확신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올 리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말도 어떤 결연한 선언이라기보다 술기운 속에서 튀어나온 치기처럼, 혹은 술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에 밀려난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며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듯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따라서 제목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실제로 함께 있는 존재라기보다, 푹푹 내리는 눈 속에서 소주를 마시는 화자의 마음이 불러낸 상상에 가까워 보인다. 나타샤는 그가 연모하는 대상의 이름이고, 흰 당나귀는 그 사랑과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동화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이 시의 중심 장면은 눈도 사랑도 아니다. 눈 내리는 밤, 한 사람이 혼자 소주를 마시는 풍경이다.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눈 쌓이는 산골의 마가리는 그 고독한 밤을 견디기 위해 마음속에 불러낸 작은 세계처럼 보인다.
눈은 여전히 푹푹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혼자 소주를 마신다.
그 눈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이름 하나를 안주 삼아 떠올린다.
아마 그 밤은 그렇게, 한 잔 또 한 잔의 소주와 수없이 되풀이되는 상상으로 천천히 지나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