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쓸쓸한 길>
백석의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山)뒷 옆비탈을 오른다
아-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山)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러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자연이 지켜보는 마지막 길
백석의 〈쓸쓸한 길〉은 인간의 마지막 길을 자연이 지켜보는 풍경을 그린 시처럼 읽힌다. 시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거적장사’는 거적을 파는 장사가 아니라 시신을 거적으로 말아 장사를 지내는 일을 가리킨다. 관 대신 거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남루한 생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행을 읽는 순간 거적에 말은 시신을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거적을 짊어진 사람이 산 뒤 옆비탈을 오르는 것을 보면 시신이 묻힐 자리 또한 평평하고 넉넉한 곳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시신을 감싼 거적이 새것일 리 없으니, 그 낡은 거적의 어둔 빛은 이미 이 장례의 길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죽음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길에는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자의 장례다. 울어 줄 가족도, 곁을 지킬 이웃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산가마귀가 울며 날고 도적갠가 싶은 개 한 마리가 어정어정 뒤를 따른다. 사람의 장례를 지켜보는 것이 사람 대신 자연의 생명들인 셈이다.
그러나 또 잘 따져보면 산가마귀와 도적개는 그 시체 냄새를 맡고 달려든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거적장사의 주인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기보다 또 한 번 죽은 육신이 찢길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일 게다. 그러니 이 마지막 길마저 그에게는 평온한 길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찢긴 채 흩어질 운명을 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쓸쓸하고 서글픈 한 인생을 화자는 그저 서럽고 쓸쓸하게만 보낼 수 없었던 것일까.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이스라치는 산앵두다. 그러나 산앵두와 머루가 같은 시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드나”라는 표현을 보면 그것이 꼭 산앵두나 머루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산비탈에 열린 붉고 검은 열매들을 그렇게 여겨, 그것들이 마치 장례의 제물처럼 보였던 게 아닐까. 수리취와 땅버들의 하얀 솜털은 상복처럼 보인다. 그 상복이 서럽다. 사람이 마련하지 못한 장례상을 자연이 대신 차리고, 사람 없는 장례에 자연이 대신 상복을 입은 듯한 풍경이다. 붉고 검은 열매와 흰 솜털, 까마귀의 검은 날갯짓과 흐린 하늘까지, 산비탈의 모든 것이 그 길을 둘러싸고 있다.
이 풍경은 백석의 〈여승〉에서 어린 딸이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백석의 시에서 죽음은 울음과 통곡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풀꽃과 열매와 바람 사이에 놓인 하나의 풍경처럼 나타난다. 그의 시 속 장례는 인간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연의 고요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시의 쓸쓸함은 단순히 외로운 길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을 자연만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쓸쓸함이다. 인간의 장례에서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산비탈의 풀과 열매와 바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백석의 화자는 그 장면을 그저 그 풍경의 한 자연물처럼 멀리서 지켜볼 따름이다. 그 조용한 풍경 속에서 독자 또한 한 사람의 마지막 길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오래도록 음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