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는 쪽으로 간다
비를 맞는 쪽으로 간다
비가 내린다.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같은 동 아저씨가 나를 붙잡는다.
비가 오는데 어딜 가냐고,
이런 날은 집에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굳이 비를 맞으며 나갈 일이냐고.
걱정과 타박이 반쯤 섞인 목소리다.
달리던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잡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건넨 말이다.
봄비다.
차갑다.
기온은 한 자릿수다.
어제는 동대표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저녁을 했다.
돼지 삼겹살을 무쇠솥 뚜껑 같은 불판 위에 올려 구웠다.
어쩐지 빗소리가
어제의 그 불판에서 자글거렸던 소리처럼 들린다.
오랜만에 맥주를 두 병 마셨다.
꼰대가 있는 나이에
나 역시 접어들었다.
그런데 꼰대라는 걸 모르는 건
대개 본인뿐이다.
나이가 들면
나잇값을 하게 되는 것일까.
되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고
상대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 한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칠십 후반의 동대표와 초반의 동대표가
자신이 알고 경험한 것이 전부인 양 말한다.
그 말이 아주 듣기 힘든 것은 아니다.
나름의 시간과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나는 더 말을 아끼게 된다.
다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나를
붙잡아 세우는 목소리가
어쩌면
머지않아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술자리가 정리될 무렵,
냉김치국수가 나왔다.
테이블 두 개에 한 그릇씩.
아홉 명이 기름진 고기를 먹은 뒤끝이라
다들 숟가락을 얹었다.
시원하게 뱃속 기름을 씻어내린다며.
아마도 갈린 얼음은 뱃속 주인들이 느낀 바와는 달리
뱃속에 들어간 기름을 오히려 굳게 만들었을 것이다.
살면서 느끼는 바가
실제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본의를 감추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렇게 속고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잘 마시지 않던 술이 몸에 들어가니
알딸딸했다.
얼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근심도 없는 얼굴.
해피, 해피한 얼굴.
그런 내가,
조금 흐트러진 내가
불그레한 얼굴로
낯설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내가 나를 사랑스러워하다니.
거울에 두 개의 내가 서 있었다.
아니, 세 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4차원의 나도 함께 서 있었을 것이다.
그저
잠깐,
나를 벗어나 다녀온 기분이었다.
헬스장을 그냥 건너뛸 수는 없었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를 끝내고
문 닫기 한 시간 전의 헬스장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걸어야
몸에 집어넣은 음식이 덜 곤욕스러울 것이고
조금이라도 걸으며
쉽게 오지 않은 잠도 불러봐야 할 것이다.
헬스장 유리문에 붙은
‘주취자 출입 금지’라는 문구를
슬쩍 흘겨보고 들어갔다.
런닝머신 위에 오르자
아는 얼굴이 안내 데스크 쪽에서 반색을 하며 온다.
나를 못 만날까 봐 걱정했다는 듯,
콩나물을 가져갈거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콩나물을 갖다 놨으니 가져가라고 한다.
어쩌다 말을 트게 된 인연인데,
그 이후로는
내게 냉면을 주고,
콩기름을 주고,
콩나물을 건넨다.
자기네는 먹을 사람이 없다며
한사코 내민다.
괜찮다고 거절을 해도
운동 끝나면 가져가라고 한다.
이건 조금 예의가 없는 건가 싶다가도,
그 여자의 선의를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더 예의 없는 일 같아서
받고는 있는데
어제는
고맙다는 말에 더해
잘 먹겠다는 말에 더해
“나만 이뻐하는 거 아니에요?”
애교 섞인 한 마디를 흘렸다.
때로는 이것저것 정색하며 따지는 사람이
아마도 술기운을 빌려
표정을 조금 풀었을 것이다.
비가 내린다.
빗소리 속에서
엊저녁 삼겹살이 지글거리던 소리가 난다.
얼굴로 빗줄기가 들이친다.
안경 위로 빗물이 흐른다.
가끔은 밋밋한 일상이라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술을 마신다.
적당히 취하면 세상이 가볍다
세상과 다투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 나와 다투지 않게 된다.
나의 365일 그날그날 이어지던 하루가
어딘가로 도망갈 수 있고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때로는 사람이 사는 그 어디에서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아쉽고 슬프고 쓸쓸한 생각이 들면
보이는 것들이 애틋하고
내게 주어진 것들이 감사하며
가슴 밑바닥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빗소리에
뭔가가 꿈틀거리며 올리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이 빗속을 혼자 달리는 일이 이상하게 즐겁다.
오늘은
누군가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내 속도의 비를 따라 조금 더 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