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공기
늦은 오후의 공기
여든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다.
우리 어머니 표현을 빌면 두 분은 갑생이다.
남자 어르신은 과거 중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다는 분이다.
그날 그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어딘가 기운이 빠진 얼굴로 거실을 서성였다.
손에는 목도장을 쥐고 있었다.
인감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로
그날의 공기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어르신 말로는
분명히 책상 위에 놓아두었는데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어르신과 함께
이미 몇 번이나 뒤졌을 법한 단층 서랍을 다시 열었다.
갖은 전자 제품의 충전기와
마이마이 같은 소형 라디오,
부서진 연필,
몇 개의 동전과 지갑 같은 것들 사이에
혹시나 끼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하나씩 들어 올려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거실이며
여자 어르신이 주무시는 안방 서랍까지
차례로 열어 보았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여자 어르신이 한마디 했다.
인감을 서랍에 잘 넣어 두지, 왜 아무데나 놓고 찾느냐고.
마지막에 “참 별꼴이다”라는 말까지 얹었다.
두 분 다 청력이 좋지 않았다.
여자 어르신은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잘 듣지 못했고,
남자 어르신은 잘 듣지 못하면서도 보청기를 끼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무리 크게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시던 분이
그날따라 그 말만은 또렷이 들은 모양이었다.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이내 욕설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평소 앉아 식사를 하던 의자를 번쩍 들어
여자 어르신 쪽으로 던지려 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몸으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
여자 어르신은 가슴을 부여잡고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침대에 누워 버렸고,
나는 남자 어르신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그놈의 인감도장을 찾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짚고 걷던 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의자를 들던 순간의 꼿꼿한 자세가 자꾸 떠올랐다.
사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그 흔들거리던 걸음이 어떻게
순간 그렇게 단단해질 수 있는지,
그 느릿하던 몸이 어떻게
한순간 번쩍 힘을 모을 수 있는지.
사람이란,
끝내 알 수 없는 힘을 품고 사는 존재다.
그 순간 어르신에게 인감은
마치 생의 과제처럼 보였다.
그걸 찾지 못하면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소파 밑이며 침대 밑을 들여다보며 애썼다.
그 거구의 몸으로 어린아이처럼 엎드려
지팡이를 쑤셔 넣고 바닥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 우습다가도 곧 가련해졌다.
나도 넋 놓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서랍을 뒤집고,
정리하고,
다시 흐트러뜨리는 일을 반복했다.
찾는 시늉이 아니었다.
그걸 찾지 못하면
그날 안으로 이 집을 나서기는
글러먹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어르신은 인감 찾기에 꽂혀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어 보였다.
그분 방 안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난 다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장으로 눈을 돌렸다.
행거에 걸린 옷들을 하나씩 들춰 보며
주머니란 주머니를 모두 뒤졌다.
그러다 최근에 입었던 조끼 주머니에서
무언가 손끝에 걸렸다.
도장이었다.
휴우,
가슴 깊은 데서 안도감이 먼저 흘러나왔다.
나는 반쯤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여기 있네요. 이거 맞지요?”
남자 어르신은 그것을 받아 들고도
잠시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게 왜 거기 들어가 있지…”
어색한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 어르신이
그 모습을 보며 또 한마디를 보탰다.
“별꼴이야, 별꼴.
도장을 서랍에 넣어 둬야지,
호주머니에 넣어 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말에는
안도와 타박이 뒤섞여 있었다.
도장 하나를 찾지 못해 온 집안을 뒤집고,
그 도장이 없다고 분노하던 노인의 모습은
사실 낯설지 않았다.
사람은 잃어버린 물건 앞에서
그토록 오래, 더 깊이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작은 도장 하나였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과
아직은 스스로를 붙잡고 있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까지 다급했고,
그래서 그토록 화가 났고,
그래서 끝내
그 조그마한 물건 하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손바닥만 한 물건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그것을 찾아내며 겨우 제자리를 찾는 일.
그날 도장은 다시 찾았지만,
그분은 그것을 찾은 만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자기 손으로 지켜 오던 삶의 질서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내게 더 또렷이 남은 것은
서랍을 뒤집던 손과,
분노와 서러움이 스쳐 가던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가만히 내려놓던
늦은 오후의 공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