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68

백석의 <흰 밤>

by 인상파

백석의 <흰 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런 밤이었다



마을의 눈이 밝힌 흰 밤


백석의 〈흰 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싸한 밤을 그린 시다. 무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되려는 듯한데, 뜸을 들일 틈도 없이 끝나 버린 게 흠이라면 흠일까. 그 이후는 온전히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그 밤, 수절과부는 무엇 때문에 목을 매었을까.


그 밤은 화자가 바라보는 현재의 밤과는 다른 밤이지만, 분위기는 닮아있다. 이 흰 밤을 이루는 것은 달과 박이다. 옛 성의 돌담 위로 떠 있는 달과, 묵은 초가지붕 위에서 달처럼 둥글고 하얗게 빛나는 박. 하늘의 달과 지붕 위의 박이 서로 마주 보며 밤을 밝힌다. 달 하나의 밤이 아니라, 달이 둘 떠 있는 듯한 밤이다.


이 풍경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달은 옛 성의 돌담과 이어지고, 박은 묵은 초가지붕과 맞닿아 있다. ‘옛’과 ‘묵은’이라는 수식어는 이 마을이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 시간은 한 마을의 기억과 전설이 쌓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오래된 시간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런 밤이었다.” 시는 그 죽음의 사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밤이었다고만 말한다. 그래서 이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오래된 마을의 기억 속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때 달과 박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박은 “또 하나 달같이” 빛난다. 그 순간 밤에는 달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떠 있게 된다. 두 개의 둥근 흰빛이 마을을 환하게 비춘다. 이렇게 밝은 밤에는 숨길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두 개의 달은 자연의 달빛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빛 아래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바로 수절과부의 죽음이다. 시는 그 여인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다만 “수절과부 하나”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마을이 붙여 놓은 이름과 시선이 들어 있다. 한 여인이 아니라 ‘수절과부’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수절과부’.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여자에게 마을의 눈은 언제나 한 가지를 요구한다. 지켜야 할 것, 끝내 지켜졌는지를 확인하려 드는 눈길. 그 삶은 살아가는 일이기보다 감시당하는 시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마을은 그녀를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수절’이라는 이름 아래 두고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달과 박이 함께 밝히는 이 흰 밤은 더욱 서늘하다. 두 개의 달처럼 떠 있는 흰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마을의 시선이 겹쳐진 빛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밝음 속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 무엇이든 드러나고, 무엇이든 이야기로 남는다.


그 밤에 한 여인이 목을 맸다. 그 죽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시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마을의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 죽음이라는 것. 그래서 이 흰 밤은 단순히 밝은 밤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끝내 드러내고 마는 눈빛의 밤이다.


그 흰 밤에 무슨 정념에 사로잡혀 여자가 목을 맸을 것이라 여겼던 나의 생각은 이렇게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그 여인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정절을 지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마을의 시선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죽음이었을까.


이 물음은 끝내 답을 얻지 못한 채 남는다. 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밤을, 그런 밤이었다고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달이 뜨고, 박이 또 하나의 달처럼 빛나던 밤. 마을 전체가 환하게 드러나던 밤.


어쩌면 그 밤은 한 사람의 죽음을 만들어 낸 밤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 여인을 둘러싸고 있던 시선이 끝내 모습을 드러낸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밤의 흰빛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듯, 그 여인의 삶을 옥죄던 마을의 눈길이 그 밤에 이르러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빛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흰 밤은 더 이상 고요한 달밤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개의 달처럼 겹쳐진 빛 아래에서,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끝내 놓아주지 않는 마을의 시선이 환하게 드러나는 밤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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