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70

백석의 〈청시(靑柿)〉

by 인상파

백석의 〈청시(靑柿)〉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백석, 기척의 시인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장면이 아니라 기척이다. 무엇인가가 지나갔다는 느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있었던 어떤 움직임. 그의 시는 그것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그 뒤에 남은 것들로만 말한다.


〈산비〉에서도 그렇다. 산비가 산뽕잎을 치는 소리, 그 소리에 놀라 날아오르는 비둘기, 그리고 나무등걸의 자벌레가 그쪽을 향해 몸을 드는 장면만이 남는다. 비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비를 맞은 것들의 반응만이 이어지며, 보이지 않는 중심을 둘러싼다.


〈청시〉역시 그러하다. 이 시는 〈산비〉처럼 풍경의 시로 읽히지만, 실은 기척을 느끼게 하는 시다.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이 시를 읽으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를 애도하는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떠오른다. 누이의 죽음을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에 비유한 그 노래처럼, 이 시에서도 바람과 떨어짐이 함께 놓인다. 이른 바람과 잎, 바람과 이른 감의 조합이 서로 닮아 있다.


〈청시〉에서는 죽음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는 어딘가 서늘하게 겹쳐진다. 별 많은 밤에 부는 하누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일으키는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 바람에 푸른 감이 떨어지고, 그 소리에 개가 짖는다.


이 시 역시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연쇄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바람은 보이지 않고, 우리는 다만 떨어지는 것과 짖는 것 사이에서 어떤 기척을 감지할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바람의 시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무엇의 흔적을 보여주는 시처럼 읽힌다.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 지나가고, 그 여파가 사물과 생명에 닿아 남는 순간. 그 짧은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설명되지 않은 어떤 기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기척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흰 밤〉에서도 마찬가지다. 달과 박이 환하게 빛나는 그 흰 밤에는, 이미 죽은 수절과부의 죽음의 기척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밤이지만, 한때 누군가 목을 매었던 그 밤과 겹쳐지면서 서늘해진다.


그래서 〈흰 밤〉에서의 ‘흰’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상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빛이다. 자연의 빛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과 시선에 의해 밝아진 밤. 이미 지나간 죽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밤, 그것이 이 시의 흰 밤이다.


이렇게 보면 백석의 시는 자연을 그린 시가 아니다. 자연 속 사건을 설명하는 시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들, 가장 먼저 반응하는 존재들, 그리고 오래 사라지지 않는 기척을 붙잡는다.


비는 사라지고, 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죽음은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감이 떨어지는 순간이나 개가 짖는 소리, 자벌레의 몸짓, 그리고 지나치게 밝은 한밤의 빛 속에 남아 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백석’은 그의 필명이다. 하얀 돌이라는 뜻의 이름. 기척의 시들을 따라 읽다 보니, 문득 그의 이름에 이르게 된다.


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바람이 스쳐 가도, 비가 내려도 그것을 붙잡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곁을 지나간 것들의 기척은 묘하게 남는다. 돌은 그것을 오래 품고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의 필명이 뜻하는 바처럼 그의 시도 그러하다. 주변에서 먼저 흔들리는 것들, 가장 낮은 자리의 반응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어떤 움직임을 드러낸다. 감이 떨어지고 개가 짖고, 자벌레가 몸을 들고, 한밤의 빛 속에 죽음의 기억이 스민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의 흔적이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조금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려 하기보다, 무엇이 지나갔는지를 먼저 느끼는 자리로.


바람은 보이지 않고, 비는 이미 그쳤으며, 죽음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이 떨어지는 순간, 개가 짖는 소리, 빗방울에 놀라 날아오르는 비둘기, 지나치게 밝은 한밤의 빛 속에서 다시 스며 나온다.


그래서 그의 시를 다 읽고 난 뒤에도 문장보다 먼저 남는 것이 있다. 설명되지 않은 채 오래 머무는 어떤 감각. 이미 지나갔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의 기척.


그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 서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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