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성장통
명확하게 형언할 수는 없지만, 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냄새가 있다. 그것을 느끼며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난다. 비 냄새다. 흐릿한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면, 아니나 다를까 흙과 아스팔트는 더욱 선연하게 진해져 있으며, 풀과 나뭇잎은 해갈의 기쁨에 비가 자신에게 부딪히는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듯 보인다.
비는 특유의 냄새와 처연한 분위기로 나를 감상에 빠지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비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하나 더 있다. '비는 점진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워준다.'
바퀴가 남기고 간 궤적, 신발이 남기고 간 족적, 누군가 어지럽히고 간 흔적들을 비는 최선을 다해 지워준다. 움푹 파인 그곳에 자신을 밀어 넣어 다른 것을 끌어와 빈 공간을 채운다. 색이 칠해진 그곳에 자신을 쓸어 들여 그 색상을 희미하게 만든다. 마치 이전에 누군가가 다녀가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그 이전의 상태로 재편한다. 하지만 온전히 메우거나 지우지는 못한다. 생채기가 난 후에 만들어진 흉터가 초기 본래의 상태로는 되돌아갈 수 없듯이.
이별 후 나의 깊은 곳 어딘가, 그 세계에서도 비가 내린다. 그 비는 내 마음상태를 대변한다. 외부의 비와는 다르게 난 이 비가 썩 반갑지 않다. 슬프고 애통하지만 난 그 비를 멈출 수 없다. 내가 힘들어하는 만큼 점진적으로 그녀가 남기고 간 궤적과 족적 그리고 흔적들을 지워, 이전의 상태로 돌려줄 것임을 알기에 난 그대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게끔 그 장면을 멀거니 지켜만 볼 뿐이다.
내 심연 속 비도 바깥 비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흔적을 초기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그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남는다는 것을 안다. 그 흉터를 보며 생각한다. 나에게도 사랑했던 이가 있어 감사했음을, 이 또한 날 성숙하게 만드는 하나의 과정임을. 비가 오는 창 밖 모습과, 그 창문에 비친 내 자신의 모습을 겹쳐 바라보며 난 한참 동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