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한 잔을 들이키자 역시나 균열이 생긴다. 매번 생겨났던 그 자리다. 균열은 보통 과거의 그 자리를 기억하고 있다, 다시 똑같은 곳에 자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달걀에 금이 가듯 선명하고 불규칙하게,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가는 선이 보인다. 그 선은 점차 두꺼워지다, 틈새로서 역할을 치환하고, 그 틈새 사이로 공간을 확보해 놓으며 사라진다. 선이 만들어놓고 간 그 공간에 모종의 존재가 꿈틀대고 있다.
두 번째 잔을 들이키자 꿈틀대던 그 존재가 균열이 난 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특유의 쓰고 거북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알코올의 향이 그 존재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든 것이다. 그 존재는 내 안에 기거하고 있는 또 다른 '나'이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슬슬 나올 채비를 한다. 그가 매번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묵시적 언약인 것이다.
세 번째 잔을 들이킨다. 세 번째가 맞나, 싶다. 이제부터는 카운트하지 않기로 한다. 아니, 제대로 숫자를 셀 수가 없다, 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다. 리버서블 자켓을 거꾸로 뒤집어서 착용하면 안쪽에 숨어있던, 기존에 바깥에 있던 옷과 전혀 다른 디자인, 전혀 다른 색상의 옷이 모습을 드러낸다. 같은 개념으로서 나의 안 속에 있던 그가 거꾸로 뒤집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바깥에 있던 기존의 나를 안 속으로 욱여넣으며 우리 스스로를 전도시킨다.
n번째 잔을 들이킨다. 이제는 완전하게 주객전도 되어 그가 내 의식의 핸들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다. 그 핸들의 방향이 어디를 향할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달릴지는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맘이다. 난 깊고 아득한 의식의 저 구석 속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우리의 전도는 가역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띠기에 본질적인 '나'는 자연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그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구역과 어지러움을 놓고 가고, 기억은 앗아간다.
이런 작용원리와 패턴을 인지하고 또 자각하고 있지만, 알코올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술이라는 물질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여러 관계들이나 사회 속에 매우 심원히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난 평생 이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갈 운명이라는 강력한 예감을, 아니, 다짐을 마음속에서 떨쳐놓을 수가 없다.